
누구의 한 시간이든 같은 값, 타임뱅크(Time Banking)

눈이 듣는 소리를 바꾼다, 맥거크 효과(McGurk Effect)
두툼한 스테이크를 프라이팬에 구우면 겉은 금세 타는데 속은 아직 붉은 경우가 많습니다. 속까지 익히려고 오래 두면 이번에는 겉이 딱딱하게 말라 버립니다. 그런데 어떤 식당의 고기는 가장자리부터 한가운데까지 같은 분홍빛으로 고르게 익어 있고, 자르면 육즙이 그대로 배어 나옵니다.
이런 고기를 만드는 대표적인 방법이 바로 ‘수비드(Sous Vide)’입니다. 수비드란 프랑스어로 ‘진공 상태에서’라는 뜻으로, 음식을 비닐 봉지에 넣어 공기를 빼고 밀봉한 뒤 정확한 온도로 맞춘 물속에서 오랜 시간 천천히 익히는 조리법을 의미합니다.
본 자료에서는 수비드가 음식을 고르게 익히는 원리와 이 조리법이 생겨난 역사, 온도에 따라 달라지는 식감, 그리고 꼭 지켜야 할 안전 수칙까지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봉지 속에서 천천히 익는 요리의 과학
물의 온도가 곧 완성 온도

수비드의 핵심은 물의 온도를 음식이 최종적으로 도달해야 할 온도와 똑같이 맞춘다는 데 있습니다.
(1) 넘칠 수 없는 열
프라이팬이나 오븐은 음식이 도달해야 할 온도보다 훨씬 뜨겁습니다. 그래서 알맞은 순간에 꺼내지 못하면 금세 지나치게 익습니다. 반면 수비드에서는 음식이 자기가 담긴 물보다 뜨거워질 수 없으므로, 시간이 조금 넘어도 지나치게 익을 걱정이 거의 없습니다.
(2) 공기를 뺀 봉지의 역할
공기는 열을 잘 전하지 못합니다. 봉지에서 공기를 빼면 물의 열이 음식 표면에 곧바로 닿아 골고루 전해집니다. 또한 봉지가 육즙과 향을 가두고, 산소와의 접촉을 막아 기름이 산패해 생기는 잡내도 줄여 줍니다.
(3) 온도를 지키는 기계
물의 온도는 막대 모양의 기계가 지킵니다. 이 기계는 물을 데우는 장치와 온도를 재는 센서, 물을 돌리는 날개를 갖추고 있어 냄비 안의 물을 몇 시간이고 같은 온도로 유지합니다. 덕분에 모양이 울퉁불퉁하거나 아주 두꺼운 재료도 시간만 충분하면 겉과 속이 같은 온도로 익습니다.

공장의 보존 기술에서 셰프의 주방으로

낮은 온도로 오래 익히는 요리의 뿌리는 생각보다 깊습니다.
(1) 우연히 발견한 저온 조리
1799년 과학자 벤저민 톰프슨(Benjamin Thompson), 일명 럼퍼드 백작은 감자를 말리려고 만든 기계에 고기를 구워 보다가, 낮은 온도로 오래 익힌 고기가 놀라울 만큼 맛있다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2) 진공 포장의 등장
1960년대 중반 미국과 프랑스의 기술자들은 음식을 오래 보관하려고 진공 포장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그런데 진공 상태로 다룬 음식은 맛과 식감이 눈에 띄게 좋아진다는 사실도 함께 알게 되었습니다.
(3) 푸아그라에서 시작된 요리법
1974년 프랑스의 셰프 조르주 프랄뤼(Georges Pralus)는 로안의 유명 식당에서 이 방법으로 푸아그라를 익혔습니다. 기름이 덜 빠지고 모양과 식감이 그대로 살아 있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과학자 브뤼노 구소(Bruno Goussault)는 식재료마다 알맞은 온도와 시간을 정리해 수많은 셰프에게 가르쳤습니다.
(4) 실험실 기계에서 가정용 막대로
초기에는 요리 애호가들이 실험실용 항온 장치를 중고로 사서 쓰기도 했습니다. 2009년 무렵부터 가정용 기계가 값싸게 나오기 시작했고, 지금은 냄비 옆에 끼워 쓰는 막대형 기계와 스마트폰 앱으로 누구나 집에서 수비드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도 차이가 바꾸는 식감

수비드에서는 온도를 1도 단위로 고를 수 있어, 같은 재료로도 전혀 다른 식감을 만들 수 있습니다.
- 소고기(Red Meat): 대개 55~60도에서 익혀 속까지 고르게 분홍빛을 냅니다.
- 닭고기(Poultry): 66~71도 정도로 익혀 퍽퍽해지지 않고 촉촉하게 만듭니다.
- 달걀(Egg): 흰자와 노른자의 단백질이 굳는 온도가 달라, 63도 안팎에서는 흰자는 익고 노른자는 걸쭉하게 남습니다.
- 채소(Vegetables): 끓는점보다 낮은 온도에서 익혀 세포벽이 덜 터지므로 아삭한 식감이 남습니다.
질긴 고기가 부드러워지는 이유
질긴 고기 속 콜라겐은 낮은 온도에서도 오래 두면 부드러운 젤라틴으로 바뀝니다. 수비드는 살코기의 단백질이 지나치게 수축해 물기를 짜내기 전에 이 변화를 일으킬 수 있어, 값싼 부위도 부드럽게 만듭니다. 반대로 얇은 생선 살처럼 온도에 덜 민감한 재료도 있습니다. 두께 1.5cm 정도의 생선은 44도에서 61도 사이 어느 온도에서든 20분이 채 안 되어 익습니다.
맛있게, 그리고 안전하게

수비드에도 한계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1) 마지막 굽기
고소한 갈색 겉면을 만드는 마이야르 반응은 물이 끓는 온도보다 높은 열에서 잘 일어납니다. 그래서 수비드로 익힌 고기는 꺼낸 뒤 아주 뜨거운 팬이나 토치로 겉면만 짧게 굽습니다.
(2) 시간과 온도의 관계
낮은 온도라도 충분히 오래 유지하면 균을 줄일 수 있습니다. 고기를 오래 익힐 때는 네 시간 안에 최소 55도에 이르게 한 뒤 그 온도를 충분히 지켜야 합니다.
(3) 산소가 없을 때 자라는 균
보툴리누스균은 산소가 없는 곳에서도 자라 강한 독소를 만듭니다. 그래서 익힌 음식을 보관하려면 봉지째 얼음물에 담가 빠르게 식힌 뒤 냉장해야 합니다. 면역력이 약한 사람이나 임신부는 충분히 살균되지 않은 수비드 요리를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수비드는 불의 세기 대신 온도와 시간을 다루는 조리법입니다. 셰프의 감에 기대던 익힘 정도를 숫자로 정확하게 재현할 수 있게 해 주면서, 이제는 가정의 부엌까지 널리 퍼졌습니다.
알맞은 온도를 알고 기다릴 줄 아는 것, 그것이 재료의 맛을 온전히 살리는 요리의 첫걸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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