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장 밖의 삶, 탈상품화(Decommodification)

무지의 과신, 더닝-크루거 효과(Dunning-Kruger Effect)
갓 구운 빵은 며칠만 지나도 곰팡이가 피지만, 꿀은 뚜껑을 열어 두어도 좀처럼 상하지 않습니다. 꿀에도 물이 20% 가까이 들어 있는데, 왜 미생물은 꿀에서 자라지 못하는 걸까요? 이 차이를 설명하는 열쇠는 물의 ‘양’이 아니라 물의 ‘상태’에 있으며, 이를 나타내는 지표가 바로 ‘수분활성도(Water Activity)’입니다.
수분활성도란 쉽게 말해 ‘식품 속의 물 가운데 미생물이나 화학 반응이 실제로 이용할 수 있는 자유로운 물이 얼마나 되는지를 나타낸 값’을 의미합니다. 식품의 보관 기간과 안전성을 판단하는 핵심 기준으로, 식품영양학과 식품 산업에서 널리 쓰입니다.
본 자료에서는 수분활성도의 개념과 측정 원리부터 미생물이 자랄 수 있는 한계선, 수분활성도를 낮추는 전통과 현대의 저장법, 그리고 품질을 지키는 활용법까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합니다.
수분활성도의 원리와 식품 저장
수분활성도란 무엇인가?


식품 속의 물은 모두 같은 물이 아닙니다. 어떤 물은 단백질이나 탄수화물 같은 성분에 단단히 붙잡혀 있고, 어떤 물은 비교적 자유롭게 움직입니다. 미생물이 자라거나 화학 반응이 일어날 때 쓰이는 것은 주로 자유롭게 움직이는 물입니다.
- 결합수(Bound Water): 식품 성분과 단단히 결합해 있어 미생물이 쓰기 어려운 물입니다.
- 자유수(Free Water): 성분 사이를 자유롭게 움직이며 미생물과 반응에 쓰일 수 있는 물입니다.
수분활성도는 식품이 내는 수증기압을 같은 온도의 순수한 물이 내는 수증기압으로 나눈 값입니다. 식으로 쓰면 aw = p / p0이며, 순수한 물은 1.0, 물이 전혀 없는 상태는 0입니다. 소금이나 설탕이 많이 녹아 있을수록 물이 붙잡혀 수분활성도는 낮아집니다. 오늘날에는 시료를 밀폐된 용기에 넣고 그 위 공기의 상대습도를 재어 몇 분 만에 확인합니다. 수분활성도에 100을 곱한 값이 ‘평형상대습도(Equilibrium Relative Humidity)’와 같기 때문입니다.
이 개념이 식품 안전의 기준으로 자리 잡은 것은 오스트레일리아의 미생물학자 윌리엄 제임스 스콧(William James Scott) 덕분입니다. 그는 1950년대에 미생물의 성장을 좌우하는 것이 수분 함량이 아니라 수분활성도라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미생물이 자랄 수 있는 한계선

미생물은 종류마다 살아갈 수 있는 수분활성도의 최저선이 다릅니다. 이 한계선 아래로 낮추면 미생물이 있어도 늘어나지 못합니다.
(1) 세균: 약 0.91 이상
대부분의 세균은 수분활성도 0.91 아래에서는 잘 자라지 못합니다. 다만 식중독을 일으키는 황색포도상구균은 산소가 있는 조건에서 약 0.86까지 버티는 예외적인 세균입니다.
(2) 효모: 약 0.88 이상
많은 효모는 0.88 정도까지 자랄 수 있습니다. 당분이 매우 많은 환경에 적응한 일부 효모는 이보다 훨씬 낮은 곳에서도 살아남습니다.
(3) 곰팡이: 약 0.80 이상
곰팡이는 세균보다 건조한 환경에 강해, 많은 곰팡이가 0.80 정도까지 자랍니다. 건조에 특히 강한 일부 곰팡이는 0.61 안팎에서도 자랄 수 있습니다.
(4) 0.60 미만: 미생물의 사막
수분활성도가 0.60보다 낮으면 사실상 어떤 미생물도 번식하지 못합니다. 잘 밀봉한 과자나 분유가 오래 보관되는 이유입니다.
참고로 신선한 고기와 채소, 과일은 대개 0.95 이상이라 상하기 쉽고, 잼은 0.80 안팎이며, 꿀은 0.5에서 0.6 사이로 매우 낮습니다.
수분활성도를 낮추는 저장의 지혜

인류는 수분활성도라는 이름을 알기 훨씬 전부터 이 원리를 이용해 음식을 보관해 왔습니다.
- 건조(Drying): 햇볕과 바람에 말려 물 자체를 줄입니다. 곶감, 북어, 말린 나물이 대표적입니다.
- 염장(Salting): 소금으로 물을 붙잡아 자유수를 줄입니다. 젓갈과 굴비가 이 원리로 오래 보관됩니다.
- 당장(Sugaring): 설탕을 많이 넣어 같은 효과를 냅니다. 잼, 과일청, 양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 냉동(Freezing): 물이 얼음이 되면 미생물이 쓸 수 있는 물이 크게 줄어듭니다.
현대 식품 산업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독일의 식품과학자 로타르 라이스트너(Lothar Leistner)가 정리한 ‘장애물 기술(Hurdle Technology)’은 수분활성도, 산도, 온도, 보존료 같은 여러 장애물을 조금씩 함께 세워 미생물을 막는 방법입니다. 하나의 조건을 극단적으로 바꾸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맛과 식감을 더 잘 살릴 수 있습니다.
수분활성도로 지키는 식품의 품질

수분활성도는 미생물뿐 아니라 식품의 맛과 식감에도 큰 영향을 줍니다.
(1) 바삭함과 눅눅함
과자나 김은 수분활성도가 낮을 때 바삭하지만, 공기 중의 습기를 빨아들여 수분활성도가 올라가면 금세 눅눅해집니다. 개봉한 과자를 밀봉해 두는 이유입니다.
(2) 화학 반응의 속도
식품이 갈색으로 변하는 갈변 반응이나 지방이 산패하는 반응도 수분활성도에 따라 빠르기가 달라집니다. 미국의 식품과학자 시어도어 라부자(Theodore Labuza)는 1970년대 초 이러한 관계를 한 장의 그래프로 정리했는데, 이를 ‘식품 안정성 지도(Food Stability Map)’라고 부릅니다. 이 지도에 따르면 갈변 반응은 중간 정도의 수분활성도에서 가장 빠르고, 지방 산화는 너무 건조할 때 오히려 빨라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식품 회사는 제품마다 알맞은 수분활성도를 정해 품질을 관리합니다.
(3) 섞을 때의 주의점
수분활성도가 서로 다른 식품을 한 용기에 담으면 물은 수분활성도가 높은 쪽에서 낮은 쪽으로 옮겨 갑니다. 시리얼에 말린 과일을 섞을 때 과일은 딱딱해지고 시리얼은 눅눅해지는 현상이 그 예입니다.
수분활성도는 ‘물이 얼마나 있느냐’보다 ‘물이 얼마나 자유로우냐’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꿀과 젓갈, 곶감에 담긴 오래된 저장의 지혜도 결국 이 하나의 원리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식품 속 물의 성격을 이해하고 알맞게 다스리는 것, 그것이 안전하고 맛있는 식탁의 첫걸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