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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안을 둘러보면 오래 써도 질리지 않는 물건이 있습니다. 버튼이 몇 개 없는데도 처음 만졌을 때 바로 쓰는 법을 알 수 있고, 몇 년이 지나도 낡아 보이지 않는 물건입니다. 반대로 화려한 장식과 기능을 잔뜩 넣었지만 금세 서랍 속으로 들어가는 물건도 있습니다.
이 차이를 열 가지 기준으로 정리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독일의 산업 디자이너 디터 람스(Dieter Rams)이고, 그가 남긴 기준이 ‘좋은 디자인 10원칙(Ten Principles for Good Design)’입니다. 좋은 디자인 10원칙이란 쉽게 말해 ‘디자인은 꾸미는 일이 아니라 물건을 쓸모 있고 이해하기 쉽고 오래가게 만드는 일’이라는 생각을 열 문장으로 담은 지침을 의미합니다.
본 자료에서는 디터 람스가 어떤 디자이너였는지부터 10원칙의 내용, 그리고 이 원칙이 오늘날의 제품과 화면 디자인에 남긴 흔적과 한계까지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적을수록 더 좋은 디자인의 원리
디터 람스는 누구인가?

디터 람스는 1932년 독일 비스바덴에서 태어나 건축을 공부했습니다. 1955년 스물세 살에 가전 회사 브라운(Braun)에 건축·실내 디자이너로 들어갔고, 1961년부터 1995년까지 디자인 책임자로 일했고, 1997년 회사를 떠났습니다.
(1) 가구 같던 가전을 바꾼 디자인
1956년 한스 구겔로(Hans Gugelot)와 함께 만든 라디오 겸 전축 SK 4는 투명한 뚜껑 때문에 ‘백설공주의 관’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당시 가전은 나무 가구처럼 꾸미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SK 4는 기계를 기계답게 보여 주며 가전 디자인의 흐름을 바꾸었습니다.
(2) 지금도 팔리는 선반
람스는 가구 회사 비초에(Vitsœ)와도 손잡고 1960년 606 유니버설 선반 시스템을 내놓았습니다. 이 선반은 처음 모습에서 크게 바뀌지 않은 채 지금도 판매되고 있습니다.
람스의 생각은 독일어 ‘적게, 그러나 더 좋게(Weniger, aber besser)’라는 말로 요약됩니다.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그것을 더 잘 만들자는 뜻입니다.
쓰임과 이해를 위한 다섯 원칙

람스는 1970년대에 대량 소비와 쉽게 버려지는 물건이 늘어나는 모습을 보며 ‘내 디자인은 좋은 디자인인가?’라고 스스로 물었습니다. 그 답을 정리한 것이 10원칙이며, 앞의 다섯 가지는 물건을 쓰는 사람의 경험에 초점을 둡니다.
- 혁신적이다(Innovative): 기술이 발전하면 새로운 디자인의 기회도 열리지만, 혁신은 기술과 함께 나아가야 하며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 쓸모 있게 한다(Useful): 물건은 쓰려고 사는 것이므로 기능뿐 아니라 심리적·미적 만족까지 채우고, 쓸모를 흐리는 것은 덜어 냅니다.
- 아름답다(Aesthetic): 매일 쓰는 물건은 사람의 기분에 영향을 주므로 아름다움도 쓸모의 일부이며, 잘 만든 물건만이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 이해하기 쉽게 한다(Understandable): 제품의 구조를 분명히 드러내 사용자가 직관으로 기능을 알아채게 하며, 가장 좋은 경우 설명서가 필요 없습니다.
- 드러내지 않는다(Unobtrusive): 제품은 장식품이나 예술 작품이 아닌 도구이므로 차분하고 절제되어야 하며, 사용자가 자신을 표현할 여지를 남깁니다.
정직함과 지속을 위한 다섯 원칙

나머지 다섯 원칙은 소비자와 사회, 환경에 대한 책임으로 시야를 넓힙니다.
- 정직하다(Honest): 실제보다 더 혁신적이거나 강하거나 값져 보이게 꾸미지 않고, 지킬 수 없는 약속으로 소비자를 흔들지 않습니다.
- 오래간다(Long-lasting): 유행을 좇지 않기 때문에 낡아 보이지 않으며, 쉽게 버리는 시대에도 여러 해 동안 쓰입니다.
- 마지막 세부까지 철저하다(Thorough down to the last detail): 어떤 부분도 대충 정하거나 우연에 맡기지 않으며, 이런 꼼꼼함이 곧 사용자에 대한 존중입니다.
- 환경을 생각한다(Environmentally friendly): 제품의 일생 동안 자원을 아끼고 물리적·시각적 공해를 줄이는 데 이바지합니다.
- 최소한으로 디자인한다(As little design as possible): 적게, 그러나 더 좋게 만들어 꼭 필요한 기능을 돋보이게 하고, 불필요한 것은 짐이 되지 않게 덜어 냅니다.
람스는 1970년대부터 쉽게 낡게 만드는 디자인을 디자인의 잘못으로 보았습니다. 오래 쓰는 물건과 환경을 함께 이야기한 이 원칙은 오늘날의 지속 가능한 디자인 논의보다 앞선 셈입니다.
오늘의 디자인에 남긴 흔적과 한계

10원칙은 브라운 제품을 넘어 오늘날 우리가 쓰는 기기와 화면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애플과 화면 디자인으로 이어진 영향
애플의 디자이너 조너선 아이브(Jonathan Ive)는 람스의 작업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고 밝혔습니다. 첫 아이팟은 1958년 브라운 T3 휴대용 라디오와 닮았다는 평을 들었고, 아이폰의 계산기 앱은 1987년 브라운 ET 66 계산기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버튼과 메뉴를 줄이고 꼭 필요한 정보만 남기는 요즘 앱과 웹 화면의 경향도 같은 생각과 맞닿아 있습니다.
‘최소한’을 오해할 때 생기는 문제
다만 10원칙을 단순히 ‘줄이면 좋다’로 받아들이면 위험합니다. 꼭 필요한 기능이나 설명까지 빼 버리면 겉은 깔끔해도 쓰기는 더 어려워집니다. 람스가 말한 최소한은 보기 좋은 텅 빈 모습이 아니라 쓸모와 이해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의 절제입니다. 또한 기능을 강조한 이 원칙은 감정과 개성을 드러내는 장식적 디자인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디터 람스의 10원칙은 수십 년 전에 쓰였지만, 좋은 디자인이 무엇인지 스스로 점검하게 해 주는 질문 목록으로 여전히 쓰입니다. 무언가를 더할 때마다 ‘이것이 정말 필요한가?’를 묻는 습관이 원칙을 실천하는 출발점입니다.
덜어 낼수록 본질이 드러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일, 그것이 오래 사랑받는 디자인을 만드는 디자인학의 첫걸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