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섯 거인과 맞선 설계도, 베버리지 보고서(Beveridge Report)
마트 냉장고에서 우유를 고르다 보면 포장에 ‘살균’이라는 글자와 함께 온도와 시간이 적힌 제품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갓 짠 우유는 영양이 풍부한 만큼 세균도 빠르게 불어나는 식품인데, 우리는 거의 매일 이 우유를 안심하고 마십니다. 음식을 펄펄 끓이지 않으면서도 해로운 세균을 줄여 안전하게 만드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저온 살균(Pasteurization)’입니다.
저온 살균이란 쉽게 말해 ‘식품을 100℃보다 낮은 온도로 정해진 시간 동안 가열해 병원균과 부패를 일으키는 미생물, 효소를 줄이고 보관 기간을 늘리는 방법’을 의미합니다. 이 방법을 처음 실험으로 증명한 프랑스 과학자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의 이름을 따 영어로는 파스퇴리제이션이라고 부르며, 우유와 주스, 맥주, 액상 달걀 등에 널리 쓰입니다.
본 자료에서는 와인에서 시작된 살균의 역사부터 온도와 시간을 맞추는 원리, 멸균과의 차이, 그리고 영양 손실에 대한 오해와 새로운 살균 기술까지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식탁의 안전을 지키는 열, 저온 살균의 원리와 쓰임
와인에서 시작된 파스퇴르의 해법

19세기 프랑스의 포도주 산지에서는 숙성 중인 와인이 시큼하게 변해 버리는 일이 잦았습니다. 1864년 여름, 어린 시절을 보낸 아르부아(Arbois)에 머물던 파스퇴르는 이 문제를 연구하다가 어린 와인을 50~60℃ 정도로 잠깐만 데워도 산패를 일으키는 미생물이 죽고, 그 뒤에도 와인이 맛을 잃지 않고 숙성된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1) 끓이지 않아도 충분하다
그보다 앞서 프랑스 요리사 니콜라 아페르(Nicolas Appert)가 음식을 병에 담아 끓이는 보존법을 개발했지만, 오래 끓이는 만큼 맛과 향이 달라지기 쉬웠습니다. 파스퇴르의 발견은 필요한 만큼만 데워도 미생물을 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길을 열었습니다.
(2) 우유로 건너간 살균
1886년 독일 화학자 프란츠 폰 속슬렛(Franz von Soxhlet)이 우유에도 이 방법을 쓰자고 제안했습니다. 당시 도시로 실려 오는 우유는 결핵을 옮기는 주요 통로였고,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는 1912년부터 1937년 사이에만 우유로 걸린 결핵으로 약 6만 5천 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1912년 미국 뉴욕시가 우유 살균을 규정하고 이듬해 의무화한 뒤 여러 나라가 그 뒤를 따랐습니다.
온도와 시간의 균형, 살균의 세 가지 방식

살균의 핵심은 온도와 시간의 조합입니다. 온도를 낮추면 오래 가열하고, 온도를 높이면 아주 짧게 가열해도 비슷한 살균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국제식품규격(Codex Alimentarius)은 우유 살균의 목표를 열에 강한 병원균인 콕시엘라 버네티(Coxiella burnetii)를 10만분의 1 이하로 줄이는 것으로 잡고 있습니다.
- 저온 장시간 살균(Low Temperature Long Time): 63~65℃에서 30분 동안 천천히 데우는 가장 오래된 방식입니다.
- 고온 단시간 살균(High Temperature Short Time): 72~75℃에서 15~20초 동안 가열하며,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쓰입니다.
- 초고온 순간 살균(Ultra-High Temperature Processing): 130~150℃에서 0.5~5초 동안 가열해 미생물을 거의 남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저온 살균’은 끓는점보다 낮은 온도를 쓴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으로, 국내 시판 우유의 상당수는 실제로 120℃가 넘는 온도에서 몇 초 동안 처리해 유통 기한을 늘리는 방식으로 만들어집니다.
살균과 멸균은 무엇이 다를까

살균은 해로운 미생물을 안전한 수준까지 줄이는 것이지, 모든 미생물을 없애는 멸균(Sterilization)과는 다릅니다. 특히 단단한 껍질에 싸인 세균의 포자는 살균 온도에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1) 냉장 보관이 필요한 이유
살균 우유는 남은 미생물이 다시 자라지 않도록 늘 차갑게 보관해야 하며, 냉장 상태에서 보통 2주 안팎 품질이 유지됩니다. 반면 초고온으로 처리한 뒤 무균 상태로 포장한 멸균 우유는 뜯기 전까지 상온에서도 몇 달 동안 보관할 수 있습니다.
(2) 제대로 살균했는지 확인하는 법
우유 속 효소인 알칼리성 포스파타제(Alkaline Phosphatase)는 살균 온도에서 파괴됩니다. 그래서 이 효소가 남아 있지 않으면 흔한 병원균도 함께 사라졌다고 판단하며, 우리나라 식품공전도 저온 장시간·고온 단시간 살균 우유에서 포스파타제가 검출되지 않도록 정해 두었습니다.
영양 손실의 오해와 열을 쓰지 않는 살균

살균하면 영양이 다 사라진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지만, 실제 변화는 크지 않습니다. 열에 약한 일부 비타민이 조금 줄어드는 정도이며, 단백질과 칼슘처럼 우유를 마시는 주된 이유가 되는 영양소는 거의 그대로 남습니다.
살균하지 않은 우유의 위험
살균하지 않은 생우유는 살모넬라(Salmonella), 리스테리아(Listeria), 장출혈성 대장균 같은 세균에 오염될 위험이 있습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는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생우유가 다른 식중독 원인보다 훨씬 많은 입원 환자를 낳는다고 경고합니다. 특히 어린이와 노인, 임신부에게는 더 위험합니다.
열 대신 압력과 전기로
최근에는 맛과 향을 더 잘 지키기 위해 열을 거의 쓰지 않는 방법도 쓰입니다. 아주 높은 압력을 가하는 고압 처리(High Pressure Processing)와 짧은 전기 충격을 주는 펄스 전기장 처리(Pulsed Electric Field Processing)가 대표적이며, 착즙 주스 등에 활용됩니다.
저온 살균은 끓이지 않을 만큼의 열로 해로운 미생물을 줄여, 식품의 맛과 영양은 지키면서 안전과 보관 기간을 함께 늘리는 기술입니다. 160여 년 전 와인을 지키려던 실험은 오늘날 우유 한 팩의 안전을 책임지는 공중 보건의 기본이 되었습니다.
포장에 적힌 살균 방식과 보관 온도를 한 번 더 확인하고, 뜯은 우유는 바로 냉장고에 넣는 작은 습관만으로도 그 효과를 끝까지 지킬 수 있습니다.
식품에 숨은 보이지 않는 위험을 이해하는 것, 그것이 안전한 식탁의 첫걸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