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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을 끓이다 냄비 뚜껑을 열면 뚜껑 안쪽에 맺힌 물방울이 주르륵 떨어집니다. 국물은 짜고 진하지만, 뚜껑에 맺힌 물방울을 맛보면 소금기 없는 맹물에 가깝습니다. 끓는 동안 물만 김이 되어 올라갔다가 차가운 뚜껑에 닿아 다시 물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이 단순한 현상을 정교하게 다듬어 섞인 물질을 나누는 기술이 바로 ‘증류(Distillation)’입니다.
증류란 쉽게 말해 ‘액체 혼합물을 가열해 잘 끓는 성분을 먼저 기체로 날려 보낸 뒤, 그 기체를 식혀 다시 액체로 모으는 분리 방법’을 의미합니다. 물질마다 끓는점과 증발하는 정도가 다르다는 성질을 이용하는 것으로, 성분 자체를 바꾸는 화학 반응이 아니라 섞인 것을 가려내는 물리적 분리에 속합니다.
본 자료에서는 증류가 걸어온 역사부터 작동 원리와 종류, 그리고 술과 석유, 바닷물에 쓰이는 사례와 한계까지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끓는점의 차이로 섞인 것을 나누는 기술
증류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사람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김이 다시 물이 되는 현상을 눈여겨보았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바닷물이 증발했다가 맺힌 물은 짜지 않다는 사실을 기록했습니다. 기원후 1세기 무렵 로마 지배 아래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연금술사들이 증류 장치를 다루었고, 3세기의 연금술사 조시모스(Zosimos of Panopolis)가 남긴 장치 그림도 전해집니다.
증류 기술을 크게 발전시킨 것은 중세 이슬람 세계의 화학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여러 물질을 증류하며 실험을 거듭했고, 9세기 무렵에는 포도주를 증류하는 방법도 기록했습니다. 증류에 쓰던 목이 긴 유리 그릇 ‘알렘빅(Alembic)’이라는 이름도 아랍어 ‘알인비크’에서 왔습니다. 이 기술은 유럽으로 건너가 12세기 무렵 ‘불타는 물’이라 불린 알코올을 만드는 데 쓰였고, 우리나라에도 고려 시대에 원나라를 거쳐 들어와 소줏고리로 소주를 내리는 전통이 생겼습니다.
증류의 4단계 작동 원리

실험실의 작은 플라스크든 공장의 거대한 탑이든, 증류는 대체로 같은 흐름을 따릅니다.
(1) 가열한다
혼합물을 담은 그릇을 데웁니다. 온도가 오르면 각 성분의 증기압이 함께 높아지고, 전체 증기압이 바깥 압력과 같아지는 순간 액체가 끓기 시작합니다.
(2) 잘 끓는 성분이 증기에 많아진다
흔히 끓는점이 낮은 성분만 따로 끓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모든 성분이 함께 증발합니다. 다만 증발하기 쉬운 성분이 증기 속에 더 많이 섞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에탄올은 약 78도, 물은 100도에서 끓기 때문에 술을 데우면 처음 나오는 증기에는 알코올이 더 많이 들어 있습니다.
(3) 식혀서 액체로 되돌린다
올라온 증기를 차가운 물이 흐르는 냉각관에 통과시키면 다시 액체로 맺힙니다. 이렇게 모은 액체를 ‘증류액’이라고 합니다.
(4) 모으고 되풀이한다
증류액을 받아 모으고, 순도가 부족하면 같은 과정을 다시 거칩니다. 한 번 증류할 때마다 원하는 성분의 농도가 조금씩 높아집니다.
상황별로 골라 쓰는 증류의 종류

섞인 물질의 성질에 따라 증류 방법도 달라집니다.
- 단순 증류(Simple Distillation): 증기를 바로 식혀 모으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으로, 끓는점 차이가 대략 25도 이상으로 크거나 바닷물처럼 잘 날아가지 않는 소금이 녹아 있을 때 알맞습니다.
- 분별 증류(Fractional Distillation): 플라스크 위에 긴 분별관을 세워 증발과 응축을 여러 번 되풀이하게 만들어, 끓는점이 비슷한 액체들도 나눌 수 있게 한 방식입니다.
- 감압 증류(Vacuum Distillation): 압력을 낮추면 끓는점도 낮아진다는 점을 이용해, 높은 온도에서 분해되는 물질을 비교적 낮은 온도에서 끓여 냅니다.
- 수증기 증류(Steam Distillation): 원료에 뜨거운 수증기를 불어 넣어 향기 성분을 함께 날려 보내는 방식으로, 꽃과 허브에서 에센셜 오일을 얻을 때 씁니다.
끝까지 나뉘지 않는 혼합물, 공비 혼합물
모든 혼합물이 증류로 깨끗하게 나뉘지는 않습니다. 물과 에탄올은 에탄올이 질량 기준 약 95.6%에 이르면 액체와 증기의 조성이 똑같아지는데, 이를 ‘공비 혼합물(Azeotrope)’이라고 합니다. 이 지점에서는 아무리 다시 증류해도 순도가 더 오르지 않기 때문에, 더 순수한 알코올이 필요하면 물을 흡수하는 물질을 넣는 등 다른 방법을 함께 써야 합니다.
생활과 산업 속 증류, 그리고 한계

증류는 우리 생활 곳곳에 쓰이고 있습니다.
- 술(Spirits): 곡물이나 과일을 발효해 만든 묽은 술을 증류해 위스키, 브랜디, 증류식 소주처럼 도수가 높은 술을 만듭니다.
- 석유 정제(Oil Refining): 원유를 높은 탑에 넣고 가열하면 가벼운 가스와 휘발유는 위쪽에서, 등유와 경유는 중간에서, 무거운 기름과 아스팔트 원료는 아래쪽에서 나뉘어 나옵니다.
- 바닷물 담수화(Desalination): 바닷물을 끓여 소금은 남기고 수증기만 모아 마실 물을 얻습니다.
- 공기 분리(Air Separation): 공기를 아주 차갑게 식혀 액체로 만든 뒤 증류해 산소, 질소, 아르곤을 따로 얻습니다.
다만 증류는 물질을 끓여 상태를 바꾸는 방법이라 에너지가 많이 듭니다. 화학 산업에서 쓰는 에너지의 상당 부분이 증류에 들어갈 정도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열을 여러 번 다시 쓰는 장치를 만들거나, 막을 이용한 분리처럼 에너지를 덜 쓰는 방법을 함께 연구하고 있습니다.
증류는 냄비 뚜껑에 맺히는 물방울처럼 평범한 현상에서 출발해, 술과 향수부터 휘발유와 마실 물까지 만들어 내는 기술로 자랐습니다. 섞여 있는 것을 억지로 떼어 내는 대신 저마다 다른 성질을 기다려 주는 방식이라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뒤섞인 것들 속에서 저마다 다른 끓는점을 찾아 하나씩 가려내는 것, 그것이 순수한 물질을 얻기 위한 화학의 첫걸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