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정과 끝으로 기억된다, 피크엔드 법칙(Peak-End Rule)

한 줄씩 기록되는 화면의 비밀, 롤링 셔터(Rolling Shutter)
저녁 뉴스를 보다 보면 기자회견, 신제품 발표회, 기념식, 시상식처럼 미리 날짜와 장소가 정해진 소식이 유난히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진이나 화재처럼 갑자기 벌어진 일이 아니라, 처음부터 카메라 앞에 서기 위해 준비된 일들입니다. 이렇게 보도되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사건을 가리키는 말이 바로 ‘의사 사건(Pseudo-Event)’입니다.
의사 사건이란 쉽게 말해 ‘저절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언론에 보도되고 널리 알려지도록 누군가 계획하고 연출한 사건’을 의미합니다. 미국의 역사학자 대니얼 부어스틴(Daniel J. Boorstin)이 1961년 책 『이미지(The Image: A Guide to Pseudo-Events in America)』에서 처음 제시한 개념으로, 지금도 홍보와 정치, 뉴스 생산을 분석할 때 자주 쓰입니다.
본 자료에서는 의사 사건의 뜻과 탄생 배경부터 부어스틴이 꼽은 네 가지 특징, 우리 주변의 대표 사례, 그리고 이 현상이 뉴스와 여론에 남기는 영향까지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보도를 위해 연출되는 현실, 의사 사건의 특징과 영향

의사 사건이란 무엇인가?

부어스틴은 의사 사건을 설명하면서 ‘홍보의 아버지’로 불리는 에드워드 버네이스(Edward Bernays)가 1923년 책에 소개한 호텔 이야기를 예로 들었습니다.
(1) 서른 살 생일을 맞은 호텔
명성을 높이고 싶은 호텔 주인이 홍보 전문가를 찾아갑니다. 예전 같으면 요리사를 새로 뽑거나 객실을 꾸미는 방법을 떠올렸겠지만, 홍보 전문가는 호텔 개업 30주년 기념 행사를 열자고 제안합니다. 은행가와 변호사, 지역 유명 인사로 위원회를 꾸리고 성대한 연회를 열자 사진이 찍히고 신문에 실립니다. 행사 자체가 ‘이 호텔은 지역의 자랑’이라는 증거가 되고, 호텔은 실제로 그만한 명성을 얻게 됩니다.
(2) 뉴스를 찾던 시대에서 뉴스를 만드는 시대로
부어스틴은 신문과 방송이 늘어나 매일 채워야 할 지면과 방송 시간이 많아지자, 뉴스를 발견하는 대신 뉴스를 만들어 내는 일이 흔해졌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이런 사건이 넘쳐 나면서 사람들이 실제 세계보다 연출된 이미지를 더 생생하게 경험하게 되었다고 비판했습니다.
의사 사건을 가르는 4가지 특징

부어스틴은 의사 사건이 다음 네 가지 특징을 지닌다고 정리했습니다.
- 계획성(Not Spontaneous): 열차 사고나 지진처럼 저절로 일어나지 않고, 누군가 계획하거나 심어 두거나 부추겨서 생깁니다. 전형적인 예가 인터뷰입니다.
- 보도 목적(Planted for Reporting): 보도되고 퍼지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삼아, 시간과 장소도 언론이 취재하기 편하게 맞춥니다. 성공 여부는 얼마나 널리 보도되었는지로 판가름 납니다. 보도자료가 ‘추후 보도용’으로 미리 배포되면서도 이미 일어난 일처럼 쓰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 모호한 현실성(Ambiguous Relation to Reality): 실제 현실과의 관계가 애매하며,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었나’보다 ‘진짜 의도가 무엇인가’에 더 관심을 둡니다.
- 자기실현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 호텔의 기념 행사처럼, 무언가가 중요하다고 알리는 행위가 그것을 실제로 중요하게 만듭니다.
그는 이런 사건이 극적이고, 반복할 수 있으며, 또 다른 의사 사건을 낳는다고 덧붙였습니다. 기자회견 하나가 반박 회견과 해설 기사로 이어지는 것이 그 예입니다.
쉬운 예시로 보는 의사 사건

의사 사건은 생각보다 훨씬 가까이에 있습니다.
(1) 자유의 횃불 행진
1929년 버네이스는 담배 회사의 의뢰를 받아 뉴욕 부활절 퍼레이드에서 여성들이 담배를 피우며 걷도록 했습니다. 그는 담배를 ‘자유의 횃불(Torches of Freedom)’이라고 불렀고, 미리 사진가까지 배치해 이 장면이 여성 해방의 상징처럼 보도되도록 했습니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시위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판매를 늘리려고 기획된 행사였습니다.
(2) 오늘날의 의사 사건
신제품 공개 행사, 시상식의 레드카펫, 정치인의 현장 방문 사진, 기업의 기부금 전달식이 대표적입니다. 관심을 끌려는 시위나 자선 행사, 일부러 흘린 듯한 정보 공개도 같은 틀로 볼 수 있습니다. 소셜 미디어 시대에는 처음부터 짧은 영상으로 퍼지도록 설계한 ‘보여 주기용’ 장면이 새로운 의사 사건이 되고 있습니다.
의사 사건이 뉴스와 여론에 남기는 그림자

의사 사건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닙니다. 기자회견은 여러 언론에 같은 정보를 동시에 알리는 효율적인 방법이고, 캠페인 행사는 묻혀 있던 사회 문제에 관심을 모으기도 합니다.
(1) 지면을 차지하는 연출
문제는 준비된 사건이 취재하기 쉽다는 데 있습니다. 시간과 자료가 미리 주어지니 언론은 손쉽게 기사를 쓸 수 있지만, 그만큼 예고 없이 벌어지는 중요한 현실이나 오래 파고들어야 하는 문제는 뒤로 밀릴 수 있습니다. 부어스틴은 유명인을 ‘유명하다는 사실로 유명한 사람’이라고 표현하며, 이미지가 실체를 앞지르는 현상을 경계했습니다.
(2) 연출을 읽어 내는 눈
뉴스를 볼 때 ‘이 일은 누가, 왜, 언제 보도되도록 준비했을까?’를 한 번쯤 물어보면 사건의 겉모습과 속뜻을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행사의 화려함보다 실제로 무엇이 바뀌었는지를 따로 확인하는 습관도 도움이 됩니다.
의사 사건은 언론과 홍보, 정치가 서로 필요로 하는 지점에서 생겨나며, 우리가 보는 뉴스의 상당 부분이 이렇게 기획된 장면으로 채워진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연출 자체를 없앨 수는 없지만, 그 연출이 무엇을 보여 주고 무엇을 가리는지는 충분히 따져 볼 수 있습니다.
화면 속 장면 뒤에 숨은 의도와 실제 변화를 함께 살펴보는 것, 그것이 연출된 세상에서 진짜 뉴스를 가려내는 지혜의 첫걸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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