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쇳덩이 배가 뜨는 비밀, 아르키메데스의 원리(Archimedes’ Principle)

물과 기름을 한몸으로, 유화(Emulsion)
거리에서 오래 지낸 사람이 도움을 청하면 흔히 이런 답이 돌아옵니다. 먼저 술을 끊고, 치료를 받고, 쉼터에서 규칙을 지켜 보라는 것입니다. 그 단계를 모두 통과해야 비로소 내 집 열쇠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순서를 정반대로 뒤집어, 조건 없이 집부터 내어 주자는 접근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거 우선(Housing First)입니다.
주거 우선이란 쉽게 말해 ‘안정된 집은 회복의 보상이 아니라 회복의 출발점’이라는 생각을 의미합니다. 노숙을 겪는 사람에게 금주나 치료를 조건으로 걸지 않고 곧바로 영구적인 집을 제공한 뒤, 본인이 원하는 지원을 곁에서 이어 갑니다. 1992년 미국 뉴욕에서 심리학자 샘 쳄베리스(Sam Tsemberis)가 세운 비영리 단체 ‘패스웨이즈 투 하우징(Pathways to Housing)’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본 자료에서는 주거 우선의 정의와 기존 방식과의 차이부터 핵심 원칙과 지원 방식, 그리고 미국·캐나다·핀란드의 성과와 남은 과제까지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집에서 시작하는 회복, 주거 우선의 원리와 실천
주거 우선이란 무엇인가?

오랫동안 노숙인 지원은 계단을 하나씩 오르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거리에서 쉼터로, 쉼터에서 치료 시설로, 다시 단체 생활 주택으로 옮겨 가며 자격을 증명해야 마지막에 독립된 집에 닿을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이 중간 계단에서 미끄러져 다시 거리로 돌아갔다는 점입니다.
- 단계 모델(Staircase Model): 치료와 생활 규칙을 지키며 단계별로 자격을 얻어야 집에 들어갈 수 있는 기존 방식입니다.
- 주거 준비도(Housing Readiness): 집에서 살 준비가 되었는지를 먼저 따지는 생각으로, 단계 모델의 바탕이 됩니다.
- 주거 우선(Housing First): 준비도를 묻지 않고 집을 먼저 제공한 뒤 지원을 덧붙이는 방식입니다.
주거 우선은 집이 없는 상태에서는 치료도, 일자리도, 인간관계도 꾸준히 이어 가기 어렵다는 현실에서 출발합니다. 잠잘 곳과 문을 잠글 수 있는 공간이 생겨야 비로소 다음 걸음을 생각할 여유가 생긴다고 보는 것입니다.
주거 우선을 떠받치는 다섯 가지 원칙

패스웨이즈 모델은 흔히 다섯 가지 원칙으로 정리됩니다. 집만 주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의 선택을 존중하는 지원 체계가 함께 움직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1) 당사자의 선택
어디에 살지, 어떤 서비스를 받을지를 당사자가 스스로 고릅니다.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는 것이 모든 원칙의 출발점입니다.
(2) 주거와 치료의 분리
치료를 거부하거나 술을 끊지 못해도 집을 잃지 않습니다. 대신 일반 세입자처럼 임대 계약의 의무는 똑같이 지킵니다.
(3) 필요에 맞춘 지원
정신건강, 신체 건강, 고용, 생활 기술 등 사람마다 필요한 지원을 골라 제공합니다.
(4) 회복 지향
증상을 없애는 것보다 당사자가 바라는 삶을 되찾는 데 초점을 둡니다. 희망을 잃지 않도록 꾸준히 곁을 지킵니다.
(5) 지역사회 통합
한 건물에 모아 두기보다 일반 아파트 곳곳에 흩어진 집을 구해, 이웃과 어울려 평범하게 살도록 돕습니다.
숫자로 확인한 효과, 미국·캐나다·핀란드의 경험

주거 우선이 주목받은 까닭은 성과가 숫자로 뚜렷하게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2000년 발표된 뉴욕 연구에서는 패스웨이즈 입주자의 88%가 5년 뒤에도 집을 유지했지만, 기존 단계형 시설을 거친 사람은 47%만 집에 머물렀습니다.
캐나다 정신건강위원회는 2009년부터 2013년까지 밴쿠버, 위니펙, 토론토, 몬트리올, 멍크턴 다섯 도시에서 2,148명을 대상으로 대규모 무작위 비교 실험인 ‘앳 홈/셰 수아(At Home/Chez Soi)’를 진행했습니다. 마지막 6개월 동안 늘 집에 머문 비율은 주거 우선 집단이 62%로, 기존 서비스 집단의 31%보다 두 배 높았습니다.
핀란드는 2008년부터 주거 우선을 국가 노숙 정책의 중심에 두고, 큰 임시 보호소를 독립된 지원 주택으로 바꾸어 나갔습니다. 그 결과 2008년부터 2022년 사이 장기 노숙인은 68%, 홀로 지내는 노숙인은 54% 줄었습니다. 유럽 대부분 나라에서 노숙이 늘어난 시기에 거둔 성과라 더욱 눈길을 끌었습니다.
지원 방식과 앞으로의 과제

주거 우선에서 집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사람의 손길입니다. 지원의 강도는 당사자의 필요에 따라 달라집니다.
- 적극적 지역사회 치료(Assertive Community Treatment):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등이 한 팀을 이뤄 필요가 큰 사람을 집으로 찾아가 돕습니다.
- 집중 사례관리(Intensive Case Management): 필요가 중간 정도인 사람에게 담당자가 서비스를 연결하고 조정합니다.
- 임대료 보조(Rent Supplement): 소득의 일부만 월세로 내도록 차액을 채워 주어 집을 오래 지킬 수 있게 합니다.
다만 과제도 분명합니다. 값싼 임대주택이 부족한 도시에서는 집을 구하는 일 자체가 어렵습니다. 캐나다 실험에서도 약물 사용이나 정신 증상은 두 집단 모두 비슷하게 나아져, 주거 안정만큼 뚜렷한 차이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집은 회복의 바탕일 뿐, 그 위에 꾸준한 지원이 쌓여야 한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주거 우선은 노숙을 겪는 사람에게 조건 없이 집을 먼저 제공하고, 그 위에 당사자가 원하는 지원을 더하는 접근입니다. 선택 존중, 주거와 치료의 분리, 지역사회 통합 같은 원칙을 바탕으로 미국과 캐나다, 핀란드에서 높은 주거 유지율을 보여 주었습니다. 동시에 주택 공급과 꾸준한 지원이라는 숙제도 함께 남겼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자격을 묻기 전에 먼저 머물 곳을 내어 줄 수 있는지 생각해 보는 것, 그것이 사람 중심 복지의 첫걸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