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빨리 짠 코드의 이자, 기술 부채(Technical Debt)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젖은 모래 위에 서서 발을 가만히 구르다 보면, 단단하던 모래가 갑자기 물렁해지며 발이 쑥 빠져드는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 작은 현상이 거대한 지진과 만나면 건물이 통째로 기울고 땅속 하수관이 솟아오르는 무서운 재해가 됩니다. 이를 가리키는 말이 바로 ‘액상화 현상(Soil Liquefaction)’입니다.
액상화 현상이란 쉽게 말해 물을 머금은 느슨한 모래 땅이 지진처럼 강한 흔들림을 받아 순간적으로 액체처럼 변해 버리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1964년 일본 니가타 지진 때 아파트가 쓰러지지도 않고 통째로 옆으로 누운 장면이 널리 알려지면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2017년 포항 지진 때 처음으로 뚜렷한 흔적이 확인되었습니다.
본 자료에서는 액상화 현상의 뜻과 일어나는 원리부터 액상화가 잘 생기는 땅의 조건, 실제 피해 사례, 그리고 이를 막기 위한 대비 방법까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합니다.
액상화 현상의 원리와 대비
액상화 현상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밟고 서 있는 땅은 겉보기에 단단한 덩어리 같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흙 알갱이가 서로 맞닿아 기대어 있는 구조입니다. 알갱이 사이의 빈틈에는 공기나 물이 차 있는데, 지하수면보다 아래에 있는 땅은 이 빈틈이 대부분 물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런 땅이 건물의 무게를 견딜 수 있는 것은 알갱이끼리 서로 꽉 맞물려 힘을 나누어 받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진으로 땅이 앞뒤로 빠르게 흔들리면 이 맞물림이 흐트러집니다. 알갱이들이 서로 떨어져 물속에 둥둥 뜬 것과 비슷한 상태가 되면, 땅은 더 이상 고체처럼 무게를 받치지 못하고 진흙탕처럼 흐물흐물해집니다. 흔들림이 멈추고 물이 빠져나가면 땅은 다시 굳지만, 그사이 그 위의 건물과 도로는 이미 기울거나 가라앉은 뒤입니다.
땅이 액체처럼 변하는 원리

액상화를 이해하는 열쇠는 알갱이 사이에 갇힌 물의 압력, 즉 간극수압(Pore Water Pressure)입니다. 평소에는 위에서 누르는 무게를 알갱이들의 맞물림이 대부분 받치고, 물은 일부만 나누어 받습니다. 알갱이끼리 실제로 주고받는 이 힘을 흙의 유효응력(Effective Stress)이라고 부릅니다.
지진이 일어나면 느슨하게 쌓여 있던 알갱이들이 흔들리며 더 촘촘하게 다져지려 합니다. 하지만 흔들림이 너무 빨라 물이 빈틈 밖으로 빠져나갈 시간이 없으니, 알갱이가 누르는 힘이 고스란히 물로 옮겨 가 물의 압력이 점점 높아집니다. 물의 압력이 위에서 누르는 무게와 거의 같아지는 순간 알갱이 사이의 맞물림은 사라지고, 유효응력이 0에 가까워지며 땅이 액체처럼 행동하게 됩니다.
이때 높아진 압력을 견디지 못한 물과 모래가 땅의 갈라진 틈으로 뿜어져 나오기도 하는데, 이를 분사 현상(Sand Boil)이라고 합니다. 지진 뒤 논밭이나 공터에 작은 화산처럼 솟은 모래 더미가 보인다면 그 아래에서 액상화가 일어났다는 증거입니다.
액상화가 잘 일어나는 땅

모든 땅이 액상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음 조건이 겹칠수록 위험이 커집니다.
- 느슨한 모래 땅(Loose Sand): 알갱이가 성글게 쌓여 있어 흔들리면 쉽게 다져지며 물의 압력을 높입니다. 점토처럼 알갱이가 서로 달라붙는 흙은 상대적으로 잘 액상화되지 않습니다.
- 얕은 지하수면(Shallow Groundwater): 땅속 빈틈이 물로 가득 차 있어야 하므로, 지하수가 지표 가까이 있는 곳일수록 위험합니다.
- 매립지와 강가(Reclaimed Land and Riverbanks): 바다를 메운 땅이나 강이 실어 온 모래가 쌓인 평야는 최근에 만들어져 덜 다져진 경우가 많습니다.
- 강하고 긴 흔들림(Strong and Long Shaking): 흔들림이 세고 오래 이어질수록 물의 압력이 쌓일 시간이 늘어납니다.
실제로 1964년 니가타 지진 때는 강가의 모래 땅 위에 지어진 아파트들이 크게 기울었고, 같은 해 미국 알래스카 지진에서도 해안 지역의 땅이 미끄러져 내려앉았습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는 도쿄만의 매립지 곳곳에서, 같은 해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지진 때는 도시 곳곳, 특히 동부에서 액상화가 일어나 많은 집과 도로가 망가졌습니다. 2017년 포항 지진 때도 진앙 주변 논밭에서 분사 흔적이 발견되어, 우리나라 역시 안심할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액상화 피해를 줄이는 대비 방법

액상화는 지진 자체를 막을 수 없는 만큼, 땅을 미리 튼튼하게 만들고 건물을 알맞게 짓는 것이 핵심입니다.
(1) 위험 지역 알아보기
땅을 시추해 흙의 종류와 단단한 정도, 지하수의 깊이를 조사하면 액상화 위험을 미리 가늠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포항 지진 이후 지역별 액상화 위험 지도를 만들어 공개하고 있습니다.
(2) 땅을 단단히 다지기
진동이나 무거운 추로 느슨한 모래를 촘촘하게 다지면 알갱이가 더 이상 쉽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흙에 시멘트 같은 재료를 섞어 굳히는 방법도 쓰입니다.
(3) 물이 빠질 길 만들기
땅속에 자갈 기둥이나 배수재를 박아 두면 흔들릴 때 높아진 물의 압력이 빠르게 빠져나가 액상화를 늦출 수 있습니다.
(4) 깊은 기초로 받치기
말뚝을 액상화가 일어나지 않는 깊은 단단한 지층까지 박아 건물을 받치면, 위쪽 땅이 물러져도 건물이 기울 위험을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액상화 현상은 우리가 당연히 단단하다고 믿는 땅도 조건만 갖추면 한순간에 물처럼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지진이 잦지 않은 곳이라도 매립지와 강가처럼 위험한 땅을 미리 알고 대비한다면 피해는 충분히 줄일 수 있습니다.
발밑의 땅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아는 것, 그것이 지진에 강한 도시의 첫걸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