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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 명세서에 찍힌 숫자가 작년보다 커지면 누구나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런데 같은 해에 장바구니 물가가 그보다 더 많이 올랐다면, 늘어난 월급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은 오히려 줄어듭니다. 숫자는 커졌는데 살림은 빠듯해지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셈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은 오른 숫자만 보고 형편이 나아졌다고 느낍니다. 이렇게 돈의 겉모습에 속는 마음을 설명하는 말이 바로 ‘화폐 환상(Money Illusion)’입니다.
화폐 환상이란 쉽게 말해 ‘돈의 실제 구매력이 아니라 돈에 적힌 액수, 곧 명목 금액을 기준으로 이득과 손해를 판단하는 착각’을 의미합니다. 미국 경제학자 어빙 피셔(Irving Fisher)가 이름을 붙였고,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가 널리 알렸습니다.
본 자료에서는 화폐 환상이 무엇을 착각하는 것인지부터, 이를 보여 준 유명한 설문 실험, 경제 곳곳에 남기는 흔적, 그리고 이 착각에서 벗어나는 방법까지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숫자에 속는 돈 계산, 화폐 환상의 원리와 영향
명목 금액과 실질 금액

화폐 환상을 이해하려면 돈의 값을 재는 두 가지 잣대를 먼저 구분해야 합니다.
- 명목 금액(Nominal Value): 지폐나 통장에 적힌 그대로의 액수입니다. 월급 300만 원, 예금 이자 3%처럼 눈에 바로 보이는 숫자를 말합니다.
- 실질 금액(Real Value): 그 돈으로 실제로 살 수 있는 물건과 서비스의 양입니다. 물가가 오르면 같은 명목 금액이라도 실질 금액은 줄어듭니다.
예를 들어 월급이 3% 오르는 동안 물가가 5% 올랐다면, 명목 월급은 늘었지만 실질 월급은 약 2% 줄어든 것입니다. 오늘날의 돈은 그 자체로 값어치를 지닌 금이나 은이 아니라서, 실제 가치는 물가 수준에 따라 달라집니다. 화폐 환상은 이 두 잣대 가운데 눈에 잘 띄는 명목 금액만 보고 판단하는 버릇입니다.
누가 더 행복할까, 유명한 설문 실험

화폐 환상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오래 논쟁거리였습니다. 사람은 합리적이라 결국 실질 금액으로 생각한다는 반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 앤과 바버라의 월급
1997년 엘다 샤피르(Eldar Shafir), 피터 다이아몬드(Peter Diamond), 아모스 트버스키(Amos Tversky)는 사람들에게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앤은 물가가 오르지 않은 해에 월급이 2% 올랐고, 바버라는 물가가 4% 오른 해에 월급이 5% 올랐습니다.
(2) 머리와 마음이 다르게 답했다
경제적으로 누가 더 나은지 묻자 71%가 실질 소득이 2% 늘어난 앤을 골랐습니다. 그러나 누가 더 행복하겠느냐는 질문에는 64%가 실질 소득이 1%만 늘어난 바버라를 꼽았습니다. 계산은 알아도 기분은 큰 숫자를 따라간 것입니다.

(3) 깎인 임금과 덜 오른 임금
1986년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 연구진의 설문도 비슷했습니다. 물가가 그대로인데 임금을 7% 깎는 회사는 62%가 불공정하다고 답했지만, 물가가 12% 오르는데 임금을 5%만 올리는 회사는 22%만 불공정하다고 답했습니다. 실질 소득이 줄어드는 정도는 거의 같았는데도 반응은 크게 갈렸습니다.
경제 곳곳에 남는 흔적

화폐 환상은 한 사람의 기분에 그치지 않고 경제 전체에도 뚜렷한 흔적을 남깁니다.
(1) 잘 바뀌지 않는 가격과 임금
사람들이 명목 금액을 기준으로 삼으니, 회사는 임금을 깎는 일을 몹시 꺼리고 가게는 가격표를 자주 바꾸지 않습니다. 물가가 달라져도 명목 가격이 쉽게 움직이지 않는 이유 가운데 하나로 화폐 환상이 꼽힙니다.
(2) 물가를 반영하지 않는 약속
계약서나 법에 적힌 금액은 물가가 오르는 만큼 자동으로 고쳐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합리적으로 따지면 예상보다 훨씬 자주 물가에 맞춰 조정해야 하는데도 그렇지 않습니다.
(3) 실업과 물가 사이의 줄다리기
물가가 빠르게 오를 때 노동자가 명목 임금 인상에 만족하면, 회사는 실질 임금을 낮게 유지하며 사람을 더 뽑을 수 있습니다. 물가와 실업이 반대로 움직인다는 필립스 곡선(Phillips Curve)을 설명할 때 화폐 환상이 자주 등장하는 까닭입니다.
화폐 환상에서 벗어나는 법

화폐 환상은 숫자를 다루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빠질 수 있는 착각이라, 몇 가지 습관으로 미리 대비하는 것이 좋습니다.
(1) 늘 물가와 함께 본다
월급 인상률이나 예금 이자를 볼 때는 같은 기간의 물가 상승률을 빼 봅니다. 이자가 3%인데 물가가 4% 올랐다면, 통장 속 숫자는 늘었어도 실제로 살 수 있는 양은 줄어든 것입니다.
(2) 긴 기간일수록 더 조심한다
몇십 년 전 집값이나 월급을 지금 숫자와 그대로 견주면 차이가 과장되어 보입니다. 오래된 금액은 그동안의 물가 변화를 감안해 지금 돈의 가치로 바꿔 생각해야 정확합니다.
(3) 물건의 양으로 바꿔 생각한다
돈의 액수 대신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밥 한 끼나 버스 요금의 횟수로 바꿔 보면 실질 가치가 훨씬 잘 보입니다. 사람들은 물가가 아주 빠르게 오르는 때나 긴 계약을 맺을 때처럼 실질 가치가 눈에 확 띌 때에야 비로소 계산을 다시 하곤 합니다.
화폐 환상은 사람이 어리석어서라기보다, 눈앞의 숫자를 판단의 지름길로 쓰는 자연스러운 습관에서 생깁니다. 다만 그 지름길이 늘 맞는 길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 두면, 월급과 저축과 투자를 훨씬 정확하게 따져 볼 수 있습니다.
통장에 찍힌 숫자 대신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을 먼저 떠올리는 것, 그것이 돈의 진짜 가치를 읽는 경제학의 첫걸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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