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옮겼을 뿐인데 둘 다 올랐다, 윌 로저스 현상(Will Rogers Phenomenon)
아이스크림 상자에 함께 담겨 온 드라이아이스는 시간이 지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얼음이라면 녹아서 물이 고였을 텐데, 드라이아이스가 있던 자리는 젖지도 않고 하얀 김만 피어오르다 끝납니다. 고체가 액체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기체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고체가 액체 상태를 건너뛰고 바로 기체로 바뀌는 현상을 ‘승화(Sublimation)’라고 합니다. 반대로 기체가 액체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고체가 되는 현상은 ‘증착(Deposition)’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말에서는 오랫동안 이 반대 과정까지 승화라고 불러 왔기 때문에 지금도 두 말이 함께 쓰입니다.
본 자료에서는 승화가 일어나는 원리와 조건부터 드라이아이스와 눈, 나프탈렌처럼 생활에서 만나는 승화, 동결 건조와 정제처럼 승화를 이용하는 기술, 그리고 승화하는 물질을 다룰 때 알아 둘 점까지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녹지 않고 사라지는 고체, 승화의 세계

승화가 일어나는 원리와 조건

고체 속 분자들은 서로 끌어당기는 힘 때문에 제자리에 붙들려 있습니다. 열을 받으면 분자들이 더 세게 흔들리고, 그중 에너지가 충분한 분자는 이웃의 끌어당김을 이겨 내고 공기 중으로 빠져나갑니다. 이 과정에는 열이 필요하므로 승화는 주변의 열을 빼앗는 흡열 변화입니다. 승화에 드는 열은 녹는 데 드는 열과 끓는 데 드는 열을 더한 것과 같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모든 고체는 조금씩 승화합니다. 다만 대부분은 너무 느려서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승화가 눈에 띄게 일어나려면 고체 표면에서 빠져나가려는 증기의 압력이 주변 공기 속 같은 물질의 압력보다 높아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삼중점(Triple Point)입니다. 삼중점은 고체, 액체, 기체가 함께 머물 수 있는 온도와 압력입니다. 주변 압력이 삼중점의 압력보다 낮으면 그 물질은 액체로 존재할 수 없어서, 열을 받은 고체가 녹지 않고 곧바로 기체가 됩니다. 탄소나 비소처럼 삼중점 압력이 매우 높은 물질은 보통의 압력에서 액체로 만들기가 어렵고, 가열하면 대부분 승화해 버립니다.
생활 속에서 만나는 승화

승화는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서 일어납니다. 대표적인 예를 살펴보겠습니다.
(1) 드라이아이스
드라이아이스는 이산화탄소를 얼린 고체입니다. 이산화탄소의 삼중점은 약 5.1기압, 영하 56.6도라서 1기압에서는 액체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대기압에서는 영하 78.5도에서 녹지 않고 바로 기체가 됩니다. 이때 피어나는 하얀 김은 이산화탄소 자체가 아니라, 차가워진 공기 속 수증기가 작은 물방울로 맺힌 것입니다.
(2) 눈과 얼음
물의 삼중점 압력은 약 612파스칼로 대기압보다 훨씬 낮지만, 공기가 아주 건조하면 영하의 날씨에도 눈과 얼음이 조금씩 승화합니다. 추운 날씨가 이어지는데도 쌓인 눈이 녹은 흔적 없이 줄어드는 이유입니다. 빙하가 깎여 나가는 데에도 승화가 한몫을 합니다.
(3) 나프탈렌
옷장에 넣어 두던 좀약의 성분인 나프탈렌은 분자끼리 끌어당기는 힘이 약해 상온에서도 서서히 승화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좀약이 작아지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승화는 지구 밖에서도 일어납니다. 혜성이 태양에 가까워지면 표면의 얼음이 승화하면서 먼지와 함께 뿜어져 나와 혜성을 둘러싼 뿌연 머리와 긴 꼬리를 만듭니다. 화성의 극지방에서는 겨울에 대기 속 이산화탄소가 얼어붙어 드라이아이스 층이 쌓였다가, 봄이 오면 다시 승화해 대기로 돌아갑니다.
승화를 이용하는 기술

승화는 산업과 연구 현장에서 쓸모 있는 도구가 됩니다.
- 동결 건조(Freeze-drying): 식품이나 약을 얼린 뒤 압력을 낮춰 얼음을 곧바로 수증기로 날려 보냅니다. 열을 많이 가하지 않아 맛과 모양, 성분을 잘 지킬 수 있어 인스턴트 커피나 건조 과일, 백신 같은 의약품을 만드는 데 쓰입니다.
- 승화 정제(Sublimation Purification): 불순물이 섞인 고체를 진공에서 가열하면 승화하는 물질만 기체가 되어 차가운 표면에 깨끗한 결정으로 다시 맺힙니다. 아주 높은 순도가 필요한 유기 전자 소재를 정제할 때도 이 방법을 씁니다.
- 승화 전사(Dye-sublimation Printing): 특수 잉크로 인쇄한 종이를 열과 압력으로 누르면 염료가 기체가 되어 폴리에스터 원단이나 코팅된 머그잔 속으로 스며듭니다. 잘 갈라지거나 벗겨지지 않는 인쇄가 됩니다.
과학 수사에서도 승화를 활용합니다. 요오드를 살짝 데우면 보랏빛 증기로 승화하는데, 이 증기가 종이에 남은 지문의 기름 성분에 달라붙어 눈에 보이지 않던 지문을 드러냅니다.
승화하는 물질을 다룰 때 알아 둘 점

승화는 고체가 조용히 기체로 바뀌는 현상이라 위험을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특히 드라이아이스는 1킬로그램만 승화해도 수백 리터의 이산화탄소 기체가 생기므로 다음을 지키는 것이 좋습니다.
(1) 밀폐하지 않기
드라이아이스를 뚜껑을 꽉 닫은 병이나 페트병에 넣으면 늘어난 기체의 압력 때문에 용기가 터질 수 있습니다.
(2) 환기하기
좁은 차 안이나 닫힌 방에 많은 양을 두면 이산화탄소가 쌓여 숨쉬기 어려워질 수 있으므로 공기가 잘 통하는 곳에 둡니다.
(3) 맨손으로 만지지 않기
영하 78.5도의 고체에 피부가 닿으면 동상을 입을 수 있으니 장갑이나 집게를 사용합니다.
같은 물질이라도 압력을 높이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드라이아이스도 삼중점보다 높은 압력을 걸어 주면 액체 이산화탄소로 녹일 수 있습니다. 승화는 물질의 고정된 성질이 아니라 온도와 압력이 함께 정하는 결과인 셈입니다.
녹는 과정을 건너뛰는 승화는 물질이 언제나 고체, 액체, 기체의 순서를 밟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눈앞에서 사라지는 고체를 보며 그 물질이 놓인 온도와 압력을 함께 떠올려 보는 일, 그것이 물질의 상태 변화를 깊이 이해하는 화학적 사고의 첫걸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