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과 그림이 함께 남는다, 이중 부호화 이론(Dual Coding Theory)

넘어지지 않고 걷는 비밀, 영 모멘트 점(Zero Moment Point)
마트에서 장을 보다가 하얀 우유갑이 줄지어 놓인 진열대에 빨간 상자 하나가 끼어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으신가요? 집에 돌아와 떠올려 보면 다른 우유의 이름은 가물가물해도 그 빨간 상자만은 또렷하게 기억납니다. 이처럼 비슷한 것들 사이에서 홀로 다른 하나가 더 잘 기억되는 현상이 바로 ‘폰 레스토프 효과(Von Restorff Effect)’입니다.
폰 레스토프 효과란 쉽게 말해 ‘비슷한 대상이 여럿 있을 때, 나머지와 다른 하나가 가장 기억에 남기 쉽다’는 원리를 의미합니다. 다른 것을 따로 떼어 낸다는 뜻에서 고립 효과(Isolation Effect)라고도 부르며, 1933년 독일의 정신과 의사이자 소아과 의사인 헤트비히 폰 레스토프(Hedwig von Restorff)가 처음 실험으로 밝혔습니다.
본 자료에서는 이 효과를 처음 보여 준 기억 실험부터 다름을 만드는 대비 수단, 일상과 화면 속 예시, 그리고 디자인에 쓸 때 꼭 지켜야 할 원칙까지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다름이 기억을 만드는 원리와 디자인 활용
폰 레스토프 효과란 무엇인가?

폰 레스토프는 베를린 대학교 심리학 연구소에서 게슈탈트 심리학자 볼프강 쾰러(Wolfgang Köhler)의 지도를 받으며 이 연구를 했고, 1933년 학술지 「심리학 연구(Psychologische Forschung)」에 결과를 실었습니다. 그녀는 무의미한 철자들로 이루어진 목록 속에 숫자 하나를 끼워 넣는 식으로 실험했고, 참가자들은 그 숫자를 다른 항목보다 훨씬 잘 떠올렸습니다.
- 고립 항목(Isolated Item): 목록에서 종류나 생김새가 홀로 다른 항목으로, 가장 잘 기억되는 대상입니다.
- 동질 항목(Homogeneous Items): 서로 닮은 나머지 항목들로, 서로 섞여 하나하나가 흐릿하게 남습니다.

흥미롭게도 숫자가 목록의 두세 번째처럼 아직 규칙이 드러나기 전에 나와도 효과는 나타났습니다. 그녀는 그림과 바탕을 나누어 보는 지각의 원리가 기억에서도 똑같이 작동한다고 보았습니다. 눈에 띄는 하나보다 그 하나를 둘러싼 바탕이 얼마나 서로 닮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억 연구에서는 이처럼 두드러진 차이가 기억을 돕는 성질을 변별성(Distinctiveness)이라고 부르며, 폰 레스토프 효과를 그 대표적인 예로 다룹니다.
다름을 만드는 4가지 대비 수단

디자인에서는 이 원리를 시각적 대비로 바꾸어 씁니다. 사용자 경험 원칙을 정리한 「UX의 법칙(Laws of UX)」은 중요한 정보와 핵심 행동을 눈에 띄게 다르게 만들라고 권합니다. 이때 출발점은 강조할 하나가 아니라 나머지 요소들을 먼저 가지런히 맞추어 두는 일입니다. 주변이 제각각이면 아무리 색을 바꾸어도 홀로 다른 하나가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1) 색과 명도
회색 버튼 사이의 진한 파란 버튼처럼 색상이나 밝기를 바꾸는 방법으로, 가장 빠르고 흔하게 쓰입니다.
(2) 크기와 굵기
같은 글자 사이에서 한 줄만 크고 굵게 쓰면, 읽기 전부터 그 줄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3) 모양과 여백
네모난 카드 사이의 둥근 카드, 혹은 주변을 비워 홀로 떨어뜨린 요소는 색을 바꾸지 않아도 도드라집니다. 긴 목록에서 한 항목만 맨 위에 따로 고정해 두는 것도 위치로 다름을 만드는 방법입니다.
(4) 움직임
가만히 있는 화면에서 살짝 흔들리거나 빛나는 알림은 시선을 강하게 끕니다. 다만 그만큼 피로도 크게 주는 수단입니다.
쉬운 예시로 이해하는 폰 레스토프 효과

[사례 1] 요금제 비교표의 ‘추천’ 카드
세 가지 요금제가 나란히 놓인 화면에서 가운데 카드만 테두리가 진하고 ‘추천’ 띠가 붙어 있으면, 많은 사람이 그 카드부터 읽고 오래 기억합니다. 회사가 가장 권하고 싶은 선택지를 고립 항목으로 만든 셈입니다. 이때 양옆의 두 카드는 일부러 같은 색과 모양으로 맞추어 두어야 가운데 카드가 더 또렷하게 살아납니다.
[사례 2] 교과서의 형광펜
시험 범위에서 꼭 필요한 문장 몇 줄에만 형광펜을 칠하면 복습할 때 그 줄이 먼저 떠오릅니다. 하지만 쪽 전체를 칠하면 칠한 부분이 오히려 바탕이 되어 아무것도 기억에 남지 않습니다. 강조가 효과를 내려면 강조하지 않은 부분이 충분히 넓어야 합니다.
[사례 3] 되돌릴 수 없는 버튼
‘계정 삭제’처럼 되돌릴 수 없는 버튼을 붉은색과 경고 아이콘으로 다르게 표시하면, 사용자가 무심코 누르기 전에 한 번 멈추게 됩니다. 기억을 돕는 원리가 여기서는 실수를 막는 안전장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폰 레스토프 효과를 쓸 때 지켜야 할 원칙

대비는 많이 쓸수록 힘이 약해지는 도구입니다. 효과를 제대로 살리려면 다음 세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1) 강조는 아껴 씁니다
모든 것을 강조하면 아무것도 강조되지 않습니다. 눈에 띄는 요소끼리 서로 다투거나 지나치게 화려해 광고처럼 보이면, 사용자는 오히려 그 부분을 건너뜁니다. 한 화면에서 가장 강하게 드러낼 대상은 하나로 정하고, 나머지는 한 단계 낮은 강조로 정리하는 편이 좋습니다.
(2) 색에만 기대지 않습니다
색각 이상이 있거나 시력이 약한 사용자는 색 차이를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웹 콘텐츠 접근성 지침(WCAG)도 색만으로 정보를 전하지 말라고 정하고 있으므로, 글자나 아이콘, 굵기를 함께 바꾸어야 합니다.
(3) 움직임은 조심스럽게 씁니다
움직이는 화면에 어지럼이나 멀미를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움직임으로 대비를 줄 때는 짧고 부드럽게 쓰고, 기기의 동작 줄이기 설정을 따르도록 만드는 것이 좋습니다.
폰 레스토프 효과는 사람의 기억이 모든 것을 고르게 담지 않고, 바탕과 다른 하나를 먼저 붙잡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무엇을 다르게 만들지보다 무엇을 다르게 만들지 않을지를 정하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차분하게 정돈된 바탕이 있어야 꼭 필요한 하나가 비로소 빛을 낼 수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하나만 골라 분명하게 다르게 보여 주는 것, 그것이 기억에 남는 디자인의 첫걸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