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은 다를 거라는 착각, 도박사의 오류(Gambler’s Fallacy)
추운 겨울날 베란다에 두었던 생수병을 꺼내 뚜껑을 여는 순간, 멀쩡한 물이 순식간에 하얀 얼음으로 변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으신가요? 분명 영하의 날씨였는데 물은 얼지 않은 채 액체로 남아 있다가, 작은 충격 하나에 한꺼번에 얼어붙습니다.
물은 0℃에서 언다고 배우지만, 실제로는 0℃보다 차가워져도 바로 얼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처럼 액체가 어는점보다 낮은 온도까지 식었는데도 고체로 바뀌지 않고 액체 상태를 유지하는 현상을 ‘과냉각(Supercooling)’이라고 부릅니다.
본 자료에서는 과냉각이 무엇인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자연과 생활 속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그리고 과냉각을 다룰 때 무엇을 알아 두어야 하는지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과냉각의 이해
어는점 아래에서도 얼지 않는 액체


과냉각은 물질의 상태가 바뀌어야 할 온도를 지났는데도 원래 상태가 이어지는 현상입니다. 물이라면 0℃ 아래로 내려가도 얼음이 되지 않고 물로 남아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때의 물을 ‘과냉각수’라고 합니다.
과냉각된 액체는 겉보기에는 평범한 물과 다르지 않지만, 매우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비탈 위에 겨우 멈춰 선 공처럼, 작은 계기만 있으면 더 안정한 상태인 얼음으로 단숨에 바뀌려고 합니다. 그래서 병을 흔들거나 얼음 조각을 넣으면 순식간에 얼음 결정이 번져 나갑니다.
과냉각은 물에만 있는 현상이 아닙니다. 금속, 유리를 만드는 재료, 여러 가지 용액에서도 나타나며, 화학과 재료 공학에서 중요한 연구 대상입니다.
과냉각을 처음 기록으로 남긴 사람으로는 온도 눈금으로 유명한 독일계 과학자 다니엘 가브리엘 파렌하이트(Daniel Gabriel Fahrenheit)가 꼽힙니다. 그는 1724년, 공기를 뺀 유리 용기 속의 물이 어는점보다 차가워져도 얼지 않다가 용기를 흔들자 곧바로 얼어붙는 모습을 관찰했다고 보고했습니다. 이 관찰은 물이 언제 어는지가 온도만으로 정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준 초기의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왜 바로 얼지 않을까

과냉각이 생기는 까닭은 액체가 고체가 되려면 먼저 ‘씨앗’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1) 결정핵이 있어야 언다
물이 얼려면 물 분자 몇 개가 먼저 얼음 모양으로 가지런히 모여 작은 덩어리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 덩어리를 결정핵이라고 하며, 결정핵이 생기는 과정을 핵생성(Nucleation)이라고 합니다. 결정핵이 너무 작으면 금세 다시 흩어지기 때문에, 일정한 크기 이상으로 자라야 비로소 얼음이 번져 나갈 수 있습니다.
(2) 불순물과 표면이 씨앗 역할을 한다
보통의 물에는 먼지, 작은 기포, 그릇의 거친 표면 같은 것이 있어서 이것들이 결정핵이 생기는 자리를 쉽게 만들어 줍니다. 반대로 깨끗한 물을 매끄러운 용기에 담아 조용히 식히면 씨앗이 될 곳이 적어 과냉각이 잘 일어납니다.
(3) 순수한 물은 훨씬 낮은 온도까지 버틴다
불순물이 거의 없는 아주 작은 물방울은 영하 30℃ 아래까지도 얼지 않을 수 있으며, 대략 영하 38~40℃에 이르러서야 스스로 얼어붙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자연과 생활 속 과냉각

과냉각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서 자주 일어납니다.
- 구름(Cloud): 영하의 구름 속에도 얼지 않은 과냉각 물방울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비행기가 이런 구름을 지나면 물방울이 날개에 닿자마자 얼어붙어 착빙이 생길 수 있습니다.
- 어는 비(Freezing Rain): 높은 하늘에서 녹아 비가 된 물방울이 지면 근처의 영하 공기층을 지나며 과냉각된 채 떨어지다가, 땅이나 나뭇가지에 닿는 순간 얼어 투명한 얼음 막을 만듭니다. 도로 위의 위험한 빙판도 이렇게 생길 수 있습니다.
- 슬러시 음료(Slush Drink): 냉동실에서 과냉각된 음료를 꺼내 흔들거나 부으면 그 자리에서 살얼음이 생기는데, 이를 재미 삼아 즐기기도 합니다.
비슷한 원리를 쓰는 물건도 있습니다. 똑딱이 손난로는 아세트산 나트륨 용액이 굳어야 할 온도보다 낮은데도 액체로 머무는 상태를 이용합니다. 안에 든 금속판을 꺾으면 결정이 생기기 시작하고, 용액이 굳으면서 열을 내어 손을 따뜻하게 해 줍니다.
과냉각을 다룰 때 알아 둘 점

과냉각은 쓸모 있는 기술이 되기도 합니다. 식품 분야에서는 재료를 얼리지 않으면서 어는점보다 조금 낮은 온도에 두어 신선도를 오래 지키려는 연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얼음 결정이 생기지 않으니 세포가 덜 손상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과냉각 상태는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작은 진동이나 온도 변화만으로도 한꺼번에 얼 수 있으므로, 과냉각을 이용하는 장치는 온도를 정밀하게 다스려야 합니다. 어는 비가 예보된 날에는 길이 젖어 보여도 얼어 있을 수 있으니 운전과 보행을 더욱 조심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과냉각은 ‘0℃가 되면 반드시 언다’는 단순한 생각이 늘 맞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상태가 바뀌는 데에는 온도뿐 아니라 그 변화를 시작할 계기도 필요하다는 점이 과냉각이 주는 중요한 교훈입니다.
과냉각은 얼어야 할 때를 지나서도 액체로 머무르는 물질의 신기한 모습입니다. 이 현상을 알면 겨울 하늘의 구름과 빙판길, 냉동실 속 음료와 손난로까지 한결 새롭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변화에는 조건뿐 아니라 시작할 계기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 그것이 물질의 변화를 깊이 이해하는 과학의 첫걸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