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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큰 병에 걸려 몇 달 동안 일을 쉬어야 한다면, 우리의 생활은 어떻게 될까요? 어떤 나라에서는 월급의 상당 부분을 보장받으며 치료에 전념할 수 있지만, 어떤 나라에서는 당장 집세를 걱정해야 합니다. 이처럼 일을 할 수 없을 때에도 삶이 무너지지 않도록 사회가 얼마나 지켜 주는지, 그 정도를 나타내는 개념이 바로 ‘탈상품화(Decommodification)’입니다.
탈상품화란 쉽게 말해 ‘개인이 노동시장에 자신의 노동력을 팔지 않고도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생활 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 정도’를 의미합니다. 사회복지학에서는 한 나라의 복지제도가 얼마나 튼튼한지를 비교하는 대표적인 잣대로 쓰입니다.
본 자료에서는 탈상품화의 뜻과 등장 배경부터 이를 재는 기준, 탈상품화 정도에 따라 나뉘는 복지국가의 3가지 유형, 그리고 이 개념이 받은 비판과 보완까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합니다.
탈상품화와 복지국가 유형
탈상품화란 무엇인가?


시장경제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임금을 받고, 그 돈으로 생활합니다. 이 점에서 노동력은 시장에서 사고파는 ‘상품’과 같은 처지에 놓입니다. 문제는 사람은 물건과 달리 병들고, 나이 들고, 일자리를 잃는다는 점입니다.
헝가리 출신의 경제사학자 칼 폴라니(Karl Polanyi)는 1944년 저서 『거대한 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에서 노동을 순수한 상품처럼 시장에 맡기면 사회 자체가 무너질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이 문제의식을 이어받아 덴마크의 사회학자 요스타 에스핑안데르센(Gøsta Esping-Andersen)은 1990년 『복지 자본주의의 세 가지 세계(The Three Worlds of Welfare Capitalism)』에서 탈상품화를 복지국가 비교의 핵심 개념으로 제시했습니다.
- 상품화(Commodification): 생계가 전적으로 노동력을 파는 데 달려 있는 상태입니다.
- 탈상품화(Decommodification): 시장 밖에서도 권리로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권리로서’라는 말입니다. 자선 단체의 도움처럼 베푸는 쪽의 선의에 기대거나, 가난을 증명해야만 겨우 받을 수 있는 지원은 탈상품화 정도가 낮다고 봅니다. 시민이라면 누구나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보장이어야 진정한 탈상품화라 할 수 있습니다.
탈상품화를 재는 3가지 기준

에스핑안데르센은 노령연금, 질병급여, 실업급여라는 세 가지 제도를 나라별로 살펴 탈상품화 점수를 매겼습니다. 이때 중요하게 본 것은 단순히 돈을 얼마나 쓰느냐가 아니라, 제도가 얼마나 쉽게, 충분히, 오래 생활을 지켜 주느냐였습니다.
(1) 받기 위한 조건
급여를 받으려면 얼마나 오래 보험료를 내야 하는지, 소득이나 재산 조사를 거쳐야 하는지를 봅니다. 조건이 까다로울수록 탈상품화 정도는 낮아집니다.
(2) 급여의 수준
일할 때 받던 소득과 비교해 급여가 얼마나 되는지를 나타내는 ‘소득대체율(Replacement Rate)’을 봅니다. 급여가 너무 적으면 결국 다시 일터로 내몰리게 됩니다.
(3) 적용 범위와 기간
전체 인구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제도의 보호를 받는지, 급여를 받을 수 있는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를 따집니다.
예를 들어 실업급여가 직전 임금의 80%를 1년 동안 보장하는 나라와, 30%를 3개월 동안만 주는 나라는 같은 제도를 갖고 있어도 실직자가 느끼는 안정감이 전혀 다릅니다.
탈상품화로 나눈 복지국가의 3가지 유형

에스핑안데르센은 탈상품화 정도와 사회 계층에 미치는 영향을 함께 따져, 서구 복지국가를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었습니다.
[유형 1] 자유주의 복지국가
미국,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가 대표적입니다. 시장의 역할을 중시하고, 국가의 지원은 소득 조사를 거친 저소득층에게 주로 돌아갑니다. 탈상품화 정도가 가장 낮습니다.
[유형 2] 보수주의 복지국가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가 대표적입니다. 직업과 지위에 따라 나뉜 사회보험이 중심이어서, 일하며 보험료를 낸 만큼 보호를 받습니다. 탈상품화는 중간 수준이며 기존의 계층 차이가 유지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유형 3]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가 대표적입니다. 모든 시민을 대상으로 한 보편적 제도가 높은 수준의 급여를 보장하며, 탈상품화 정도가 가장 높습니다.
탈상품화 개념의 한계와 보완

탈상품화는 복지국가 연구의 흐름을 바꾸었지만, 몇 가지 중요한 비판도 받았습니다.
(1) 돌봄 노동을 놓쳤습니다
여성주의 학자들은 이 개념이 임금 노동을 하는 사람, 주로 남성을 기준으로 만들어졌다고 지적했습니다. 집에서 아이와 노인을 돌보는 사람에게는 시장보다 가족에 대한 의존이 더 큰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2) 탈가족화라는 보완
이러한 비판을 받아들여 에스핑안데르센은 1999년 저서 『후기 산업 경제의 사회적 기초(Social Foundations of Postindustrial Economies)』에서 ‘탈가족화(Defamilialization)’ 개념을 함께 다루었습니다. 돌봄의 부담을 국가나 시장이 나누어 가족에게만 지우지 않는 정도를 뜻합니다.
(3) 세 가지 유형 밖의 나라들
남유럽 국가들이나 한국, 일본 같은 동아시아 국가들은 세 유형 어디에도 딱 들어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이어졌습니다. 이에 따라 1996년 이탈리아의 정치학자 마우리치오 페레라(Maurizio Ferrera)는 가족의 역할이 큰 ‘남유럽형’을, 2000년 영국의 정치학자 이언 홀리데이(Ian Holliday)는 경제 성장을 앞세운 동아시아의 ‘생산주의 복지 자본주의(Productivist Welfare Capitalism)’를 제안했습니다.
탈상품화는 복지를 ‘가난한 사람에게 베푸는 도움’이 아니라 ‘시민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권리’로 바라보게 한 개념입니다. 물론 높은 탈상품화에는 그만큼 많은 세금과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숙제도 따릅니다.
일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사회를 함께 그려 보는 것, 그것이 더 나은 복지국가의 첫걸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