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어디서나 통하는 졸업장, 국제 바칼로레아(International Baccalaureate)

빛을 쫓아 기어 다닌 기계, 그레이 월터의 거북 로봇(Grey Walter’s Tortoises)
지하철 노선 안내판, 항공사 로고, 공항 표지판을 떠올려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장식 없는 반듯한 글자가 격자에 맞춰 왼쪽으로 가지런히 놓여 있고, 멀리서도 한눈에 읽힙니다. 이렇게 깔끔하고 정돈된 화면의 뿌리를 따라가면 1950년대 스위스의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다듬은 한 가지 양식을 만나게 됩니다. 이 양식이 바로 ‘스위스 스타일(International Typographic Style)’입니다.
스위스 스타일이란 쉽게 말해 ‘보이지 않는 격자 위에 산세리프 글자와 사진을 비대칭으로 배치해, 꾸밈보다 정보를 객관적이고 명료하게 전하려 한 그래픽 디자인 양식’을 의미합니다. 영어로는 ‘국제 타이포그래피 양식’이라 부르며, 학자에 따라 두 이름을 구분하기도 하지만 흔히 같은 뜻으로 함께 씁니다.
본 자료에서는 스위스 스타일이 생겨난 배경부터 눈에 띄는 특징, 헬베티카라는 글꼴과 대표 디자이너, 그리고 세계로 퍼져 나간 과정과 그에 대한 평가까지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정보를 질서 있게 보여 주는 디자인, 스위스 스타일
스위스 스타일은 어떻게 생겨났나?

스위스 스타일은 1920년대 유럽의 모더니즘 디자인을 이어받아 스위스에서 하나의 체계로 정리된 양식입니다.
(1) 앞선 흐름들
러시아의 구성주의, 네덜란드의 데 스테일(De Stijl), 독일의 바우하우스는 장식을 덜어 내고 기하학적 형태로 메시지를 전하려 했습니다. 스위스 디자이너들은 이런 실험을 받아들여 누구나 따라 할 수 있는 규칙으로 다듬었습니다.
(2) 취리히와 바젤의 학교
1918년 취리히 공예학교 교수가 된 에른스트 켈러(Ernst Keller)는 특정한 모양을 가르치기보다 ‘디자인의 답은 내용에서 나와야 한다’는 태도를 가르쳤습니다. 취리히와 바젤의 디자인 학교는 이 생각을 이어 가며 스위스 스타일의 산실이 되었습니다.
(3) 전쟁 뒤의 필요
제2차 세계대전 뒤 나라 사이의 교류와 무역이 늘면서, 언어와 문화가 달라도 쉽게 읽히는 시각 언어가 필요해졌습니다.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를 함께 쓰는 스위스는 이런 실험을 하기에 알맞은 곳이었습니다.
한눈에 알아보는 네 가지 특징

스위스 스타일은 디자이너의 개성보다 정보가 먼저 보이도록 몇 가지 원칙을 지킵니다.
- 격자(Grid): 화면을 일정한 칸으로 나누고 글과 그림을 그 칸에 맞춰 배치해 질서를 만듭니다.
- 비대칭 배치(Asymmetric Layout): 가운데 정렬 대신 한쪽으로 치우친 배치로 긴장감과 읽는 흐름을 만듭니다.
- 산세리프 글꼴(Sans-serif): 획 끝에 돌기가 없는 단순한 글자를 쓰고, 글줄은 왼쪽에 맞추고 오른쪽 끝은 들쭉날쭉하게 둡니다.
- 객관적인 사진(Objective Photography): 꾸며 낸 그림보다 사실을 그대로 보여 주는 사진을 즐겨 씁니다.
이 원칙들은 모두 ‘보는 사람이 디자이너의 감정이 아니라 내용 자체를 만나게 하자’는 생각에서 나왔습니다.

헬베티카와 대표 디자이너들

스위스 스타일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글꼴 ‘헬베티카(Helvetica)’입니다.
(1) 노이에 하스 그로테스크
바젤 근처의 하스 활자 주조소를 이끌던 에두아르트 호프만(Eduard Hoffmann)은 막스 미딩거(Max Miedinger)에게 새 산세리프 글꼴을 맡겼고, 이 글꼴은 1957년 ‘노이에 하스 그로테스크(Neue Haas Grotesk)’라는 이름으로 처음 선보였습니다. 1959년 식자기용으로 다시 만들면서 라틴어로 ‘스위스의’라는 뜻을 지닌 헬베티카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2) 요제프 뮐러브로크만
요제프 뮐러브로크만(Josef Müller-Brockmann)은 1950년부터 취리히 톤할레 음악회 포스터를 만들며 음악의 리듬을 도형과 글자의 배치로 옮겼습니다. 1981년에 낸 책 『그래픽 디자인의 그리드 시스템(Grid Systems in Graphic Design)』은 지금도 디자인 교재로 읽힙니다.
(3) 노이에 그라피크
1958년 뮐러브로크만은 한스 노이부르크(Hans Neuburg) 등과 함께 잡지 『노이에 그라피크(Neue Grafik)』를 펴냈습니다. 여러 언어로 된 이 잡지는 지면 자체가 스위스 스타일의 본보기가 되어 생각을 나라 밖으로 실어 날랐습니다.
세계로 퍼진 스위스 스타일과 그 평가

스위스 스타일은 1960년대 들어 미국과 유럽의 기업과 공공 기관으로 빠르게 퍼졌습니다.
(1) 기업과 도시의 얼굴
독일 항공사 루프트한자는 1962년 기업 이미지에 헬베티카를 썼고, 마시모 비녤리(Massimo Vignelli)는 1967년 아메리칸 항공의 로고를 이 글꼴로 만들었습니다. 뉴욕 지하철은 1989년 헬베티카를 안내 표지의 표준 글꼴로 정했습니다.
(2) 비판과 반작용
한편 어디서나 비슷한 화면을 만들어 차갑고 단조롭다는 비판도 받았습니다. 1970년대 바젤의 볼프강 바인가르트(Wolfgang Weingart)처럼 일부러 규칙을 흩뜨리는 실험이 나온 것도 이런 반작용이었습니다.
(3) 오늘의 화면 속에서
그럼에도 격자와 여백, 명료한 글자 위계는 웹사이트와 앱 화면을 설계하는 기본 원리로 지금까지 쓰이고 있습니다.
스위스 스타일은 아름다움을 더하기보다 정보를 정리하는 데서 좋은 디자인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칸을 나누고 글자를 가지런히 놓는 일은 단순해 보이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낯선 도시의 표지판도 망설임 없이 읽을 수 있습니다.
꾸미기 전에 무엇을 먼저 보여 줄지 정하는 것, 그것이 스위스 스타일이 가르친 명료한 디자인의 첫걸음입니다.
이 글 PDF 구매
1,000원한국어 PDF · 같은 계정으로 다시 다운로드할 수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