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 위를 걷는 비밀, 표면 장력(Surface Tension)
월급이 똑같은 두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한 사람은 건강해서 버스와 지하철로 어디든 다니지만, 다른 한 사람은 휠체어를 타야 해서 경사로가 없는 건물이나 계단뿐인 역 앞에서 번번이 발길을 돌립니다. 손에 쥔 돈은 같아도 두 사람이 누리는 삶은 결코 같지 않습니다. 이 차이에 주목하는 관점이 바로 ‘역량 접근법(Capability Approach)’입니다.
역량 접근법이란 쉽게 말해 ‘사람이 무엇을 가졌는가보다 그것으로 실제로 무엇을 하고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가를 묻는 관점’을 의미합니다.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인 아마르티아 센(Amartya Sen)이 처음 제시했고,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이 발전시켰으며, 오늘날 빈곤과 복지, 개발을 바라보는 중요한 틀로 자리 잡았습니다.
본 자료에서는 역량 접근법의 기본 개념부터 같은 자원이 다른 결과를 낳는 이유, 정책과 지표로 이어진 사례, 그리고 사회복지 현장에서 지니는 의미와 한계까지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역량 접근법의 핵심 개념과 쓰임
역량 접근법이란 무엇인가?

센은 1979년 강연 「무엇의 평등인가?(Equality of What?)」에서 그동안 복지를 재던 방식에 의문을 던졌습니다. 소득이나 재화의 양만 세면 사람마다 다른 처지가 가려지고, 만족감이나 행복만 재면 오랜 결핍 속에서 기대를 낮춰 버린 사람의 어려움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센은 사람이 실제로 해내는 일과 살아가는 상태에 눈을 돌렸습니다. 이를 설명하는 두 가지 열쇠말이 있습니다.
- 기능(Functionings): 잘 먹는 것, 건강한 것, 글을 읽는 것, 일하는 것처럼 사람이 실제로 이룬 행위와 상태를 말합니다.
- 역량(Capabilities): 마음만 먹으면 이룰 수 있는 여러 기능의 조합, 곧 사람이 누리는 실질적인 자유와 기회를 말합니다.
센이 든 예가 이 차이를 잘 보여 줍니다. 단식하는 사람과 굶주리는 사람은 둘 다 먹지 못한 상태라는 점에서 같은 기능을 보입니다. 그러나 단식하는 사람은 먹을 수 있는데도 먹지 않기를 고른 것이고, 굶주리는 사람에게는 애초에 그런 선택지가 없습니다. 역량 접근법은 바로 이 고를 수 있는 자유의 차이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같은 자원, 다른 삶: 전환 요인

자전거 한 대를 똑같이 나누어 주어도 모두가 같은 만큼 자유롭게 이동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자원을 실제 기능으로 바꾸어 내는 힘이 사람과 환경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역량 접근법에서는 이를 전환 요인이라고 부르며, 흔히 세 갈래로 나눕니다.
(1) 개인적 전환 요인
몸의 건강, 장애, 나이, 배운 기술처럼 그 사람 안에 있는 조건입니다. 자전거를 배운 적이 없거나 다리를 다친 사람에게 자전거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2) 사회적 전환 요인
제도, 관습, 차별, 성별이나 계층에 따른 규범처럼 사회가 만든 조건입니다. 여성이 자전거를 타는 것을 꺼리는 사회라면 같은 자전거도 누군가에게는 쓸모가 줄어듭니다.
(3) 환경적 전환 요인
기후, 지형, 도로와 교통 시설처럼 물리적으로 둘러싼 조건입니다. 자전거 도로가 촘촘한 도시와 자동차 중심으로 설계된 도시에서 자전거가 주는 자유는 크게 다릅니다.
이 세 요인은 같은 지원이 누군가에게는 넉넉하고 누군가에게는 턱없이 모자랄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역량 접근법은 똑같이 나누는 데서 멈추지 않고, 각자가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게 되었는지를 끝까지 따져 보라고 요구합니다.
정책과 지표로 이어진 역량 접근법

역량 접근법은 이론에 머물지 않고 세계 여러 나라의 삶을 비교하는 지표로 이어졌습니다. 국내총생산처럼 돈의 흐름만 보는 잣대로는 사람들의 실제 삶을 다 담을 수 없다는 문제의식이 바탕이 되었습니다.
- 인간개발지수(Human Development Index): 1990년 유엔개발계획이 마붑 울 하크와 센 등의 생각을 바탕으로 처음 펴낸 지표로, 소득뿐 아니라 기대 수명과 교육 수준을 함께 묶어 나라별 삶의 수준을 비교합니다.
- 다차원 빈곤지수(Multidimensional Poverty Index): 2010년부터 쓰인 지표로, 소득 대신 건강과 교육, 생활 수준에서 동시에 겪는 여러 결핍을 세어 빈곤을 살핍니다.
- 핵심 역량 목록(Central Human Capabilities): 누스바움은 생명, 신체 건강, 신체의 온전함, 감각과 상상과 사고, 감정, 실천적 이성, 관계, 다른 종과의 공존, 놀이, 환경에 대한 통제의 열 가지를 모든 사람이 누려야 할 최소한으로 꼽았습니다.
센은 1998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고, 그의 연구는 경제 성장을 목표가 아니라 사람의 자유를 넓히는 수단으로 바라보는 흐름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사회복지 현장에서의 의미와 한계

사회복지는 결국 사람이 원하는 삶을 꾸릴 수 있도록 돕는 일입니다. 역량 접근법은 그 목표를 무엇으로 재고 어디에 힘을 써야 하는지에 관해 분명한 방향을 줍니다.
현장에 주는 시사점
- 필요의 다양성(Human Diversity): 장애인이나 돌봄을 맡은 사람처럼 같은 자원으로 더 적은 것을 할 수 있는 이들에게 더 많은 지원이 필요하다는 근거가 됩니다.
- 환경의 개선(Removing Barriers): 현금을 나누어 주는 일만큼 경사로와 교통, 차별 없는 제도처럼 전환 요인을 고치는 일이 중요하다는 점을 일깨웁니다.
- 선택의 존중(Respect for Agency): 정해진 삶을 강요하지 않고, 당사자가 스스로 소중하게 여기는 삶을 고를 수 있게 돕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물론 한계도 있습니다. 실현된 기능은 눈에 보이지만, 누릴 수 있었던 기회인 역량은 직접 재기가 어렵습니다. 또 어떤 역량을 중요하게 볼지를 두고 누스바움은 목록을 제시한 반면 센은 정해진 목록 대신 사회의 공개적인 토론으로 정하자고 해, 학자들 사이에서도 논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역량 접근법은 복지를 얼마나 나누어 주었는지가 아니라 사람들이 실제로 무엇을 하고 어떤 사람이 될 수 있게 되었는지로 평가하자고 제안합니다. 같은 돈과 같은 물건도 몸과 사회와 환경의 조건에 따라 전혀 다른 삶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내가 가진 것 너머로 내가 실제로 할 수 있는 것과 하지 못하는 것을 함께 살펴보는 것, 그것이 더 공정한 복지를 향한 고민의 첫걸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