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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기술이 처음 나오면 신기한 물건을 누구보다 먼저 써 보려는 사람들이 줄을 섭니다. 언론은 혁신이라며 앞다투어 소개하고, 초기 판매도 순조롭게 늘어납니다. 그런데 이렇게 화려하게 출발한 제품 가운데 상당수가 얼마 지나지 않아 판매가 뚝 끊기며 시장에서 사라집니다. 열광하던 소수를 넘어 평범한 다수에게 다가가는 길목에 보이지 않는 깊은 틈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틈을 ‘캐즘(Chasm)’이라고 합니다.
캐즘이란 원래 땅이나 바위가 갈라져 생긴 깊은 골짜기를 뜻하는 말로, 경영학에서는 신기술 제품이 초기 시장에서 주류 시장으로 넘어가기 전에 수요가 정체되거나 급격히 줄어드는 구간을 의미합니다. 미국의 경영 컨설턴트 제프리 무어가 1991년 펴낸 책 『캐즘 마케팅(Crossing the Chasm)』에서 이 개념을 널리 알렸고, 오늘날 스타트업과 신사업 전략의 기본 개념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본 자료에서는 캐즘의 뜻과 바탕이 된 혁신 확산 이론부터 틈이 생기는 이유, 캐즘을 건너는 전략, 그리고 실제 사례와 주의할 점까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합니다.
캐즘의 원리와 극복 전략
캐즘이란 무엇인가?


캐즘은 새로운 제품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움직이지 않는다는 관찰에서 출발합니다. 사람마다 새것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다르고, 그 차이가 시장을 몇 개의 무리로 나눕니다.
(1) 혁신 확산 이론
1962년 미국의 사회학자 에버렛 로저스는 『혁신의 확산』에서 새로운 기술이나 생각이 사회에 퍼지는 과정을 종 모양의 곡선으로 설명했습니다. 무어는 이 모형을 첨단 기술 시장에 맞게 다듬어 ‘기술 수용 주기’라고 불렀습니다. 곡선의 가운데가 볼록한 것은 대부분의 사람이 너무 빠르지도 늦지도 않게 새것을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2) 다섯 무리의 소비자
기술 수용 주기는 소비자를 받아들이는 순서에 따라 다섯 무리로 나눕니다.
- 혁신 수용자(Innovators): 기술 자체를 좋아해 가장 먼저 써 보는 사람들로 약 2.5%를 차지합니다.
- 초기 수용자(Early Adopters): 새 기술로 남보다 앞서 나가려는 선구자들로 약 13.5%입니다.
- 초기 다수(Early Majority): 검증된 뒤에야 사는 실용주의자들로 약 34%입니다.
- 후기 다수(Late Majority): 표준이 되고 값이 내려가야 움직이는 보수적인 소비자들로 약 34%입니다.
- 지각 수용자(Laggards): 끝까지 새것을 꺼리는 사람들로 약 16%입니다.
캐즘은 왜 생길까?

무어는 각 무리 사이에 작은 틈이 있지만, 초기 수용자와 초기 다수 사이의 틈은 특히 깊고 넓다고 보았습니다. 두 무리가 제품을 사는 이유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1) 비전을 사는 사람과 증거를 사는 사람
초기 수용자는 미래의 가능성을 보고 사므로 불편함이나 결함도 기꺼이 참아 냅니다. 반면 초기 다수는 위험을 싫어해,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이 이미 잘 쓰고 있다는 증거를 보고서야 지갑을 엽니다.
(2) 참고할 사례의 부족
실용주의자들은 같은 업계 사람의 추천을 가장 믿습니다. 그런데 주류 시장에 처음 들어가는 제품에는 그런 사례가 아직 없습니다. 아무도 먼저 사지 않으니 사례가 생기지 않고, 사례가 없으니 아무도 사지 않는 막다른 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3) 초기 시장의 착시
초기 수용자에게 거둔 성공은 회사를 들뜨게 만듭니다. 같은 방식으로 계속 팔면 된다고 믿고 인력과 돈을 늘리지만, 주류 시장의 반응은 전혀 다르게 나타납니다. 판매가 갑자기 꺾이는 순간 많은 기업이 자금이 바닥나 문을 닫게 됩니다.
캐즘은 어떻게 건널까?

무어는 캐즘을 건너는 방법을 제2차 세계 대전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빗대어 설명했습니다. 넓은 전선을 한꺼번에 공략하지 말고, 좁은 해안 한 곳에 힘을 모아 먼저 거점을 확보하라는 것입니다.
(1) 교두보 시장 공략
문제가 가장 절실한 좁은 고객층 하나를 골라, 그 시장에서 확실한 1위가 될 때까지 집중합니다. 작은 시장이라도 완전히 장악하면 실용주의자들이 믿을 만한 사례와 입소문이 생깁니다.
(2) 완전 완비 제품 제공
실용주의자는 핵심 기술만이 아니라 문제를 끝까지 해결해 주는 묶음을 원합니다. 설치, 교육, 사후 지원, 다른 제품과의 호환까지 갖춘 이 묶음을 완전 완비 제품이라고 합니다.
(3) 볼링 핀 전략
첫 시장을 차지하면 그 경험과 평판을 이웃한 시장으로 넓혀 갑니다. 이미 확보한 고객의 추천과 쌓아 둔 완전 완비 제품이 다음 시장을 여는 데 그대로 쓰입니다. 맨 앞의 볼링 핀이 쓰러지며 뒤의 핀을 차례로 넘어뜨리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입니다.
캐즘은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

캐즘은 첨단 기술 시장뿐 아니라 새로운 서비스가 퍼지는 거의 모든 곳에서 나타납니다.
- 전기 자동차(Electric Vehicle): 초기 구매자의 열기가 식은 뒤 충전 시설과 가격 부담 때문에 판매 증가가 주춤한 현상을 흔히 캐즘에 빗대어 설명합니다.
- 스마트 안경(Smart Glasses): 화제를 모은 제품들이 뚜렷한 쓰임새를 찾지 못해 일반 소비자 시장으로 넘어가지 못한 사례로 자주 언급됩니다.
- 기업용 소프트웨어(Enterprise Software): 한 업종에서 성공 사례를 쌓은 뒤 비슷한 업종으로 넓혀 가는 방식이 대표적인 극복 전략으로 쓰입니다.
다만 캐즘 모형이 모든 제품에 그대로 들어맞는 것은 아닙니다. 다섯 무리의 비율은 정규 분포를 본뜬 근사값이며, 처음부터 다수가 쉽게 받아들이는 제품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모형은 정답표라기보다 시장을 읽는 지도로 쓰는 것이 좋습니다.
캐즘은 좋은 기술만으로는 다수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소수의 열광이 다수의 신뢰로 바뀌려면, 작은 곳에서부터 확실한 증거를 쌓아 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한 걸음을 디딜 단단한 거점부터 마련하는 것, 그것이 깊은 틈을 건너는 성장의 첫걸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