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끊지 않고 이어 가는 장면의 힘, 롱 테이크(Long Take)
회사에서 상담 전화를 빨리 끝내라는 목표가 생기자 직원들이 고객의 문제를 다 풀기도 전에 전화를 끊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통화 시간은 줄었지만 같은 고객이 다시 전화를 거는 일은 오히려 늘었습니다. 숫자는 좋아졌는데 정작 일은 나빠진 셈입니다.
이처럼 무언가를 재는 숫자를 목표로 삼는 순간 그 숫자가 본래의 뜻을 잃어버리는 현상을 ‘굿하트의 법칙(Goodhart’s Law)’이라고 부릅니다. 흔히 “측정 지표가 목표가 되면 더 이상 좋은 지표가 아니다”라는 한 문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본 자료에서는 굿하트의 법칙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왜 이런 일이 생기는지,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사례는 무엇인지, 그리고 숫자를 지혜롭게 다루는 방법까지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굿하트의 법칙의 이해
굿하트의 법칙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이 법칙의 이름은 영국의 경제학자 찰스 굿하트(Charles Goodhart)에게서 왔습니다. 그는 영국 중앙은행인 잉글랜드 은행에서 통화 정책을 연구했고, 1975년 오스트레일리아 중앙은행이 연 학술회의에서 발표한 논문에서 이 생각을 처음 밝혔습니다.
당시 영국 정부는 시중에 도는 돈의 양을 지표로 삼아 경제를 조절하려 했습니다. 굿하트는 “관찰된 통계적 규칙성은 그것을 통제 목적으로 압박하는 순간 무너지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정부가 특정 지표를 붙잡고 조절하기 시작하면 사람들과 금융 기관이 그에 맞춰 행동을 바꾸기 때문에, 그 지표는 더 이상 경제의 실제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오늘날 널리 쓰이는 짧은 문장은 영국의 인류학자 메릴린 스트래선(Marilyn Strathern)이 1997년 영국 대학의 평가 제도를 다룬 글에서 정리한 것입니다. 이 덕분에 굿하트의 법칙은 경제학을 넘어 교육, 행정, 경영 등 숫자로 성과를 재는 거의 모든 분야로 퍼져 나갔습니다.
숫자가 목표가 되면 왜 망가질까


지표는 원래 우리가 직접 보기 어려운 것을 대신 보여 주는 창문입니다. 시험 점수는 실력을, 판매량은 고객의 만족을, 통화 시간은 상담의 효율을 짐작하게 해 줍니다. 그런데 이 둘은 완전히 같은 것이 아니라 대체로 함께 움직일 뿐입니다.
숫자에 상과 벌이 걸리면 사람들은 본래의 목적보다 숫자 자체를 끌어올리는 가장 쉬운 길을 찾게 됩니다. 실력을 키우는 대신 시험에 나올 문제만 외우고, 고객을 돕는 대신 통화를 서둘러 끊는 식입니다. 그러면 숫자와 실제가 서로 갈라지고, 숫자는 점점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도널드 캠벨(Donald Campbell)도 비슷한 무렵 같은 문제를 짚었습니다. 그는 사회의 의사 결정에 숫자 지표가 많이 쓰일수록 그 지표가 부패와 왜곡의 압력을 더 크게 받는다고 보았고, 이 생각은 ‘캠벨의 법칙’으로 불립니다.
여기에 한 가지 함정이 더 있습니다. 숫자를 관리하는 쪽은 지표가 좋아지는 것을 보고 일이 잘되고 있다고 믿기 쉽습니다. 그래서 숫자가 실제와 멀어지는 동안에도 문제를 늦게 알아차리고, 이미 망가진 지표를 근거로 다음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우리 주변의 굿하트의 법칙

널리 전해지는 일화로 ‘코브라 효과’가 있습니다. 영국이 인도를 다스리던 시절 델리에서 코브라를 줄이려고 잡아 온 코브라마다 돈을 주었더니, 사람들이 아예 코브라를 기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정부가 보상을 멈추자 쓸모없어진 뱀들이 풀려나 문제가 더 커졌다고 전해집니다. 사실 여부는 분명하지 않지만, 숫자에 보상을 걸 때 생기는 부작용을 잘 보여 주는 예로 자주 쓰입니다.
학교에서는 시험 점수가 학교 평가의 잣대가 되면 수업이 시험 대비 위주로 흘러가는 일이 생깁니다. 병원에서는 대기 시간 목표를 맞추려고 접수 시점을 늦추는 방식이 문제로 지적되기도 했습니다. 인터넷에서는 조회 수를 올리려고 내용과 다른 자극적인 제목을 다는 일이 흔합니다. 모두 숫자는 좋아지지만 숫자가 가리키던 본래의 가치는 줄어드는 경우입니다.
숫자를 지혜롭게 쓰는 법

굿하트의 법칙이 숫자를 쓰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숫자는 여전히 상황을 파악하는 데 꼭 필요한 도구입니다. 다만 숫자를 본래 목적을 비추는 거울로 다루고, 숫자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의 지표에만 기대지 않고 서로 보완하는 여러 지표를 함께 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통화 시간과 함께 재문의 비율과 고객 만족도를 같이 살피면, 한쪽만 억지로 끌어올리기 어렵습니다. 또 숫자 뒤에 있는 실제 현장을 직접 들여다보고, 지표가 본래 뜻과 어긋나기 시작하면 과감히 바꾸는 태도도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왜 이 숫자를 재는지 함께 이해하고 있으면, 숫자를 속이려는 유혹도 줄어듭니다. 목표의 이유를 나누는 일이 가장 좋은 예방책인 셈입니다. 실제로 많은 조직이 정해진 기간마다 지표를 다시 점검하고, 숫자로 잡히지 않는 현장의 목소리를 함께 듣는 자리를 마련해 이런 왜곡을 줄이려고 노력합니다.
굿하트의 법칙은 숫자를 다루는 모든 사람에게 겸손을 일깨워 줍니다. 숫자는 현실을 비추는 창일 뿐 현실 그 자체가 아니며, 창만 닦는다고 바깥 풍경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숫자 너머에 있는 본래의 목적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이 숫자를 믿을 만한 도구로 지켜 내는 일의 첫걸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