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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갑 속에 낡고 꼬깃꼬깃한 지폐와 갓 찍어 낸 빳빳한 지폐가 함께 있다면, 물건값을 낼 때 어느 쪽을 먼저 꺼내게 될까요? 대부분은 낡은 지폐를 먼저 내고 새 지폐는 아껴 둡니다. 둘 다 값은 똑같은데도 말입니다.
이 사소한 습관이 나라 전체로 커지면 아주 흥미로운 일이 벌어집니다. 값어치가 떨어지는 돈만 시장에 돌고, 값어치가 높은 돈은 장롱 속으로 숨거나 녹여지거나 나라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경제학에서는 이 현상을 ‘그레셤의 법칙(Gresham’s Law)’이라고 부릅니다. 흔히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 곧 나쁜 돈이 좋은 돈을 몰아낸다는 말로 알려져 있습니다.
본 자료에서는 그레셤의 법칙의 뜻과 이름의 유래부터 법칙이 작동하는 조건, 역사 속 사례, 그리고 오늘날 이 법칙을 읽는 관점까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합니다.
그레셤의 법칙의 원리와 오늘날의 의미
그레셤의 법칙이란 무엇인가?


그레셤의 법칙은 법으로 정한 액면가는 같지만 실제 가치가 다른 두 가지 돈이 함께 쓰일 때, 실제 가치가 낮은 돈만 유통되고 실제 가치가 높은 돈은 시장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말합니다.
- 양화(Good Money): 금이나 은 함량이 높아 액면가보다 실제 가치가 크거나 같은 돈입니다.
- 악화(Bad Money): 귀금속 함량을 줄이거나 깎아 내어 실제 가치가 액면가보다 낮은 돈입니다.
- 구축(Crowding Out): 악화가 거래에 쓰이는 동안 양화가 유통에서 밀려나는 것입니다.
이름은 16세기 영국의 상인이자 왕실 재정 고문이었던 토머스 그레셤(Thomas Gresham)에게서 왔습니다. 그는 엘리자베스 1세에게 질 나쁜 동전이 좋은 동전을 밀어낸다는 문제를 알린 인물로 전해집니다. 다만 ‘그레셤의 법칙’이라는 이름은 그가 세상을 떠나고 한참 뒤인 1858년, 스코틀랜드의 경제학자 헨리 더닝 매클라우드(Henry Dunning Macleod)가 붙였습니다.
비슷한 생각은 그보다 훨씬 오래되었습니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는 희극 『개구리』에서 좋은 옛 동전을 두고 질 나쁜 새 동전을 쓰는 아테네 사람들을 꼬집었고, 14세기의 니콜 오렘(Nicole Oresme)과 16세기의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도 화폐의 질이 떨어지면 좋은 돈이 사라진다고 지적했습니다.
악화가 양화를 몰아내는 원리

그레셤의 법칙은 사람들이 손해를 피하려는 아주 합리적인 선택에서 생겨납니다. 다만 아무 때나 일어나는 것은 아니고, 몇 가지 조건이 맞아떨어질 때 나타납니다.
(1) 법이 같은 값을 강제합니다
나라가 두 돈을 같은 액면가로 받아야 한다고 정해 두면, 상인은 질 나쁜 돈을 받아도 거절할 수 없습니다. 법정 화폐(Legal Tender) 제도가 법칙의 출발점입니다.
(2) 좋은 돈은 따로 쓸모가 있습니다
금화나 은화는 녹이면 금속으로 팔 수 있고, 외국에서는 무게대로 값을 쳐 줍니다. 그러니 좋은 돈은 액면가로 쓰기보다 모아 두거나 녹이는 편이 이득입니다.
(3) 사람들은 나쁜 돈부터 씁니다
같은 값이라면 누구나 나쁜 돈으로 값을 치르고 좋은 돈은 남겨 둡니다. 이런 선택이 쌓이면 시장에는 악화만 남게 됩니다.
반대로 두 돈의 교환 비율을 시장이 자유롭게 정할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상인은 나쁜 돈을 받지 않거나 더 많이 요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가가 걷잡을 수 없이 오르는 나라에서 사람들이 자국 돈 대신 달러를 찾는 것처럼, 이때는 오히려 좋은 돈이 나쁜 돈을 밀어내기도 합니다.
역사 속 그레셤의 법칙

그레셤의 법칙은 책 속 이론에 그치지 않고 여러 시대에 걸쳐 실제로 나타났습니다.
영국의 헨리 8세는 1540년대에 전쟁 비용을 마련하려고 은화 속 은의 비율을 크게 줄였습니다. 이른바 ‘대악화(Great Debasement)’ 시기에 사람들은 예전의 좋은 은화를 쓰지 않고 감추었고, 시장에는 질 나쁜 동전만 돌았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 시기의 화폐 개혁은 이런 혼란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이었습니다.
미국에서는 1965년 주화법으로 10센트와 25센트 동전에서 은이 빠졌습니다. 그러자 은이 들어 있던 예전 동전은 몇 년 사이 거래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사람들이 은 동전을 골라 따로 모아 두었기 때문입니다.
[사례 포인트]
- 동전 깎기: 금화·은화 가장자리를 몰래 깎아 낸 동전이 유통됨
- 톱니 무늬: 동전 가장자리 톱니는 깎아 내기를 막으려는 장치이기도 함
- 금은복본위제: 법정 비율이 시장과 어긋나면 한쪽 금속 동전이 사라짐
- 은 동전 수집: 은 함량이 높은 옛 동전이 생활 속에서 먼저 사라짐
오늘날 그레셤의 법칙을 읽는 4가지 관점

오늘날 우리는 금화나 은화 대신 지폐와 디지털 숫자로 거래합니다. 그래도 그레셤의 법칙은 여전히 여러 분야에서 비유로 쓰입니다.
(1) 화폐 신뢰의 문제로 봅니다
돈의 가치는 결국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정부가 화폐 가치를 함부로 떨어뜨리면 사람들은 그 돈을 피해 다른 자산이나 외국 돈을 찾습니다.
(2) 정보 비대칭과 연결합니다
경제학자 조지 애컬로프(George Akerlof)는 1970년 ‘레몬 시장’ 논문에서 그레셤의 법칙을 함께 언급했습니다. 품질을 가려낼 수 없는 중고차 시장에서는 나쁜 차가 좋은 차를 밀어내기 쉽습니다.
(3) 조직과 문화에 적용합니다
대충 일해도 똑같이 보상받는 조직에서는 성실한 사람이 먼저 떠나고, 자극적인 정보가 같은 대접을 받는 곳에서는 공들인 콘텐츠가 묻히기 쉽습니다.
(4) 조건을 바꾸면 결과도 바뀝니다
가치를 제대로 가려내고 정직하게 값을 매기는 장치가 있다면 좋은 것이 살아남습니다. 법칙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 제도가 만든 결과입니다.
결국 그레셤의 법칙은 돈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사람의 선택 이야기입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이 같은 값으로 매겨지는 순간, 사람들은 좋은 것을 아끼고 나쁜 것부터 내놓습니다.
좋은 것이 제값을 받는 구조를 만드는 것, 그것이 악화가 양화를 몰아내지 못하게 하는 첫걸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