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록 벽 앞의 순간 이동, 크로마키(Chroma Key)

하드웨어보다 빨리 느려진다, 워스의 법칙(Wirth’s Law)
회의 자료를 미리 보내 달라고 부탁했는데 동료가 끝내 보내지 않았습니다. 순간 ‘일부러 나를 곤란하게 만들려는 걸까?’ 하는 생각이 스칩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동료는 메일 주소를 잘못 적었을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서운한 일이 생겼을 때 나쁜 의도부터 의심하지 말라고 일러 주는 생활의 지혜, 그것이 바로 ‘핸런의 면도날(Hanlon’s Razor)’입니다.
핸런의 면도날이란 쉽게 말해 ‘어리석음이나 실수로 충분히 설명되는 일을 악의 탓으로 돌리지 말라’는 경험 법칙을 의미합니다. 면도날이라는 이름은 불필요한 가정을 깎아 내라는 오컴의 면도날에서 따왔습니다. 여러 설명 가운데 가능성이 낮은 쪽을 먼저 걸러 내는 생각의 도구라는 뜻입니다.
본 자료에서는 핸런의 면도날이 어디서 왔는지부터, 우리가 남의 행동을 악의로 읽기 쉬운 까닭, 일상과 조직에서 쓰는 방법, 그리고 이 원칙을 지나치게 믿을 때 생기는 한계까지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악의보다 실수를 먼저 떠올리는 생각법
핸런의 면도날은 어디서 왔을까?

이 문장이 지금의 모습으로 처음 실린 곳은 1980년 아서 블로크(Arthur Bloch)가 엮은 「머피의 법칙 두 번째 책(Murphy’s Law Book Two)」입니다. 잘못될 수 있는 일은 잘못된다는 머피의 법칙을 닮은 우스개 격언들을 모은 책으로, 여기에 “어리석음으로 충분히 설명되는 일을 결코 악의 탓으로 돌리지 말라”는 문장이 ‘핸런의 면도날’이라는 이름으로 실렸습니다.
(1) 로버트 J. 핸런은 누구일까?
책에는 핸런이 누구인지 설명이 없었습니다. 훗날 명언 연구가 마디 그로스(Mardy Grothe)가 유족을 만나 확인한 바에 따르면, 그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토비해나 육군 보급창에서 일한 컴퓨터 프로그래머 로버트 J. 핸런(Robert J. Hanlon)이었습니다. 블로크의 첫 책 「머피의 법칙」을 재미있게 읽고 자신이 지은 격언을 보냈는데, 그 문장이 두 번째 책에 실리며 이름까지 얻게 된 것입니다.
(2) 비슷한 생각은 훨씬 오래되었습니다
1774년 괴테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오해와 게으름이 간계와 악의보다 세상에 더 많은 혼란을 만든다고 썼습니다. 1941년 SF 작가 로버트 하인라인(Robert Heinlein)의 소설 「제국의 논리(Logic of Empire)」에도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상황을 악당의 짓으로 돌렸다”는 대사가 나옵니다. 지금의 문장은 1990년 프로그래머들의 은어를 모은 사전 「자곤 파일(Jargon File)」에 실리며 널리 퍼졌습니다.
우리는 왜 남의 행동을 악의로 읽을까?

핸런의 면도날이 필요한 이유는 사람의 마음이 원래 나쁜 의도를 먼저 떠올리도록 기울어 있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은 이런 경향을 몇 가지 이름으로 설명합니다.
(1) 기본적 귀인 오류
남의 행동은 성격이나 의도 탓으로 보고, 그 사람이 처한 상황은 가볍게 여기는 경향입니다. 1977년 심리학자 리 로스(Lee Ross)가 이름 붙였습니다. 내가 늦으면 길이 막혀서지만, 남이 늦으면 성의가 없어서라고 생각하는 식입니다.
(2) 적대적 귀인 편향
의도가 애매한 행동을 공격이나 무시로 해석하는 경향입니다. 복도에서 어깨가 부딪혔을 때 일부러 밀쳤다고 받아들이는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3) 이야기를 원하는 마음
‘누군가 꾸민 일’이라는 설명은 원인과 범인이 분명해 이해하기 쉽습니다. 반면 여러 사람의 작은 실수가 겹친 결과라는 설명은 복잡하고 허전하게 느껴집니다.
일상과 조직에서 쓰는 핸런의 면도날

핸런의 면도날은 거창한 이론보다 감정이 올라오는 순간에 잠깐 멈추게 하는 장치로 쓸 때 가장 쓸모가 있습니다.
- 메시지 답장(Messaging): 읽고도 답이 없는 메시지는 무시가 아니라 바빠서 잊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서운함을 표현하기 전에 한 번 더 물어보는 편이 관계를 지킵니다.
- 업무 실수(Workplace Errors): 동료의 실수가 반복되면 사람을 탓하기 전에 절차나 안내가 헷갈리게 되어 있지 않은지 살펴봅니다. 같은 실수가 여러 사람에게서 나온다면 대개 구조의 문제입니다.
- 고객 응대(Customer Service): 불친절해 보이는 답변이 사실은 담당자가 정보를 몰라서 생긴 경우가 많습니다. 확인을 부탁하면 갈등이 커지지 않고 문제가 풀립니다.
- 온라인 소통(Online Communication): 글에는 표정과 말투가 빠져 있어 짧은 문장이 차갑게 읽히기 쉽습니다. 가장 너그러운 해석을 먼저 떠올리면 불필요한 다툼을 줄일 수 있습니다.
핸런의 면도날을 쓸 때 주의할 점

핸런의 면도날은 확률에 기댄 경험 법칙일 뿐 진실을 가려 주는 판결이 아닙니다. 잘못 쓰면 오히려 판단을 흐리게 만듭니다.
(1) 진짜 악의도 존재합니다
사기나 의도적인 괴롭힘처럼 분명히 나쁜 의도가 있는 경우까지 실수로 덮어서는 안 됩니다. 같은 일이 한 사람에게만 계속 불리하게 반복된다면 증거를 차분히 다시 볼 필요가 있습니다.
(2) 실수라도 책임은 남습니다
악의가 없었다고 해서 피해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충분히 발전한 무능은 악의와 구별할 수 없다’는 그레이의 법칙(Grey’s Law)은 결과가 같다면 실수도 바로잡아야 한다는 점을 꼬집습니다.
(3) 상대를 낮춰 보는 말이 아닙니다
‘어리석음’이라는 단어 때문에 남을 깔보는 말로 오해하기 쉽지만, 본뜻은 누구나 바쁘고 서툴 수 있다는 너그러움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어리석음 대신 실수나 무지로 바꿔 말하기도 합니다.
핸런의 면도날은 서운한 일이 생겼을 때 가장 나쁜 해석보다 가장 흔한 해석을 먼저 떠올리게 하는 생각의 습관입니다. 악의를 찾는 데 쓰던 힘을 원인을 확인하고 문제를 고치는 데 돌리면, 관계는 덜 상하고 해결은 더 빨라집니다. 물론 반복되는 피해 앞에서는 차분히 증거를 살피는 균형도 함께 갖춰야 합니다.
상대를 의심하기 전에 한 번 더 묻고 확인하는 것, 그것이 오해를 줄이고 믿음을 쌓는 소통의 첫걸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