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료의 생각 없는 생각 - 양장
카테고리: 국내도서>에세이>명사에세이>기타 명사에세이
저자: 료 (지은이)
페이지 수: 360p
출판사: 열림원
출판일: 2025-06-16
가격: 18000원
평점: ☆☆☆☆☆ (0.0)
인기 순위: 에세이 주간 9위
ISBN13: 9791170403319
소개
‘런던베이글뮤지엄’, ‘아티스트베이커리’, 카페 ‘하이웨스트,’ ‘레이어드’ 등의 감각적 공간 브랜드를 창업하고, 브랜드를 전국의 ‘빵지순례객’들이 찾는 명소로 만든 사람, 료. 다층적인 시간과 감정을 자신만의 언어로 길어 올려, 첫 산문집 『료의 생각 없는 생각』에 담아냈다.
목차
Prologue
1 나를 뒤흔든 런던
2 그저 시작할 수 있는 용기
3 진짜의 베이스는 외로움
4 매일의 아름다움
5 생각 없는 생각
6 준비된 즉흥성
7 내가 나로 산다는 것
8 모든 질문의 끝에 사랑이
Epilogue_interview
책 소개
‘런던베이글뮤지엄’, ‘아티스트베이커리’, 카페 ‘하이웨스트,’ ‘레이어드’ 등의 감각적 공간 브랜드를 창업하고, 브랜드를 전국의 ‘빵지순례객’들이 찾는 명소로 만든 사람, 료. 그녀가 창조한 공간은 ‘꾸며진 컨셉’이 아닌, 감정이 축적된 풍경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줄 서는 공간을 만든 그녀는 브랜드보다 오래 남는 감각과 마음을 믿는다. 그 믿음은 그녀가 만들어온 시간의 결, 그리고 켜켜이 쌓인 감정의 레이어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다층적인 시간과 감정을 자신만의 언어로 길어 올려, 첫 산문집 『료의 생각 없는 생각』에 담아냈다.
언제나 말보다 시선을 먼저 보내는 그녀의 문장은 조용하지만 단단하다. 장르와 형식에 갇히지 않고, 온전히 ‘나다움’을 지켜내는 그녀의 글은 얼핏 가벼운 일상의 스케치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삶에 대한 깊은 애정, 인간을 향한 다정한 시선,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이 담겨 있다.
출판사 제공 책 소개
런던베이글뮤지엄 브랜드 총괄 디렉터 료의 첫 산문집
『료의 생각 없는 생각』 출간!
‘런던베이글뮤지엄’, ‘아티스트베이커리’, 카페 ‘하이웨스트,’ ‘레이어드’ 등의 감각적 공간 브랜드를 창업하고, 브랜드를 전국의 ‘빵지순례객’들이 찾는 명소로 만든 사람, 료. 그녀가 창조한 공간은 ‘꾸며진 컨셉’이 아닌, 감정이 축적된 풍경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줄 서는 공간을 만든 그녀는 브랜드보다 오래 남는 감각과 마음을 믿는다. 그 믿음은 그녀가 만들어온 시간의 결, 그리고 켜켜이 쌓인 감정의 레이어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다층적인 시간과 감정을 자신만의 언어로 길어 올려, 첫 산문집 『료의 생각 없는 생각』에 담아냈다. 언제나 말보다 시선을 먼저 보내는 그녀의 문장은 조용하지만 단단하다. 장르와 형식에 갇히지 않고, 온전히 ‘나다움’을 지켜내는 그녀의 글은 얼핏 가벼운 일상의 스케치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삶에 대한 깊은 애정, 인간을 향한 다정한 시선,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이 담겨 있다.
무심코 들어간 런던의 한 카페에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다
작고 소박했던 런던의 한 카페에서, 다양한 인종과 연령의 사람들이 완벽한 하나의 합을 이루며 각자의 방식으로 일하는 모습을 보고, 형언할 수 없는 에너지에 커다란 울림을 받은 료는 이렇게 회상한다. “오랫동안 저는 타인을 관찰하며 살아온 사람이었는데, 그날 처음으로 ‘나는 나 자신을 진심으로 바라본 적이 있었나?’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고, 그 순간 생각했어요. ‘어쩌면 내가 원했던 것은 돈이나 명예가 아니라, 아무런 조건 없이 몰입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었을까? 평생 하리라 믿었던 일을 그렇게 내려놓고, 직업을 일순간에 바꾸고 싶다는 마음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처럼 저를 뒤흔들었습니다.” 그렇게 “목표 대신 자유를 원했다”는 료.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아티스트로 태어났으며, 삶이라는 무대에서 모두가 배우로서 각자 자신만의 연기를 해내야 한다.”고 말한다.
“Being yourself, not being someone.”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나 자신으로 산다는 것’에 대하여
‘나 자신으로 산다는 것’는 료가 추구하는 삶의 핵심 가치이며, 그녀가 만들어 온 브랜드의 철학이다. 매일, 매 순간을 ‘진짜 나’로 살아가고자 하는 그녀에게, 일과 삶, 일상과 예술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공간을 만들고, 옷을 입고, 음식을 만들고, 타인과 함께 하는 모든 사소한 일상의 아름다움 속에서 일관되게 발견되는 것. 그것은 결국 ‘고유함에 대한 예찬’이다. ‘나 자신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녀는 “나에게 가장 좋은 레퍼런스는 결국 나 자신”이라고 말한다. “누군가가 이미 만들어놓은 정답을 따라가는 삶이 아니라, 내가 직접 보고, 듣고, 느끼고, 만지고, 기억하는 모든 것들을 ‘물리적으로 표현’하는 것. 그 과정 속에서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실질적인 감각이 생긴다.”고 말한다.
“나는 매일 순간의 아름다움을 스치지 않고 기록하고 싶었다.”
『료의 생각 없는 생각』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 중에 하나는 ‘아름다움’이다. 료가 말하는 아름다움은 겉모습의 화려함이나 장식적인 감상과는 다르다. 그것은 그저 바라보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무언가를 저 끝까지 알고 싶은” 사랑의 마음과 맞닿아 있다. 대상과 내가 하나가 되어보려는 이와 같은 ‘몰입’은 “단순한 관찰이 아니라 감정의 동일화”인 것이다. 바게트를 들고 돌아오는 길, 오래된 찻잔의 무늬, 해 질 녘 창문에 드리운 빛과 같은 순간들을 붙잡으며, 그녀는 말한다. “그저 세상의 아름다움을 빠짐없이 낚아채는, 아름다운 사냥꾼으로 살고 싶어요. 순간의 위트를 잃지 않으면서요.”라고. 그리고 그 모든 아름다움의 끝자락에는 언제나 ‘사랑’이 있다.
“두려움을 알고도 그저 시작할 수 있던 용기 있는 모든 분들에게”
‘비에 젖은 작은 새’와도 같은 마음이 들 때, 우리를 다시 날아오르게 하는 건 무엇일까. 무심코 들어간 런던의 한 카페에서 삶의 전환점을 맞이하고, 오래된 빈티지 물건에서 누군가의 시간을 마주하며 료는 말한다. “어쩌면 내가 제일 성장할 수 있었던 시간은 가장 약하고 두려움이 가득한, 비에 젖은 작은 새 같던 시절이었다. 열두 번 바뀌는 생각과 출처 없는 공포에 손도 못 쓰고 자꾸만 숨이 차던, 그 안에서 지도 같은 건 손에 쥐지 못한 걸 알면서도, 소맷부리로 눈물을 훔쳐내고, 캄캄한 길목에서 한 발자국 용기를 낼 때, 그 어떤 일의 시작은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 성장했다는 것은 꼭 성공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두려움을 추구했음을 의미한다. 작든 크든 성장했다는 것은 어둡고 보이지 않음을 알고도 발을 내디딘 용기에서 출발했다는 것이, 그 어떤 성공보다 훨씬 큰 의미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는 말한다. 두렵지만 “첫선을 그을 용기만 있다면 우리는 그저 시작할 수 있다.”고.
에필로그_인터뷰『료의 생각 없는 생각』을 만나다
장르와 형식의 경계를 넘나드는 실험적 창작자들을 발굴하고 소개하는 문학 웹진 ‘림Lim’을 창간하며, 새로운 도약을 알린 ‘열림원’과 ‘료’의 만남은 어쩌면 필연적인 것이었을까.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양가적인 것들의 집합체로, 도저히 경계 지을 수 없는 료와의 첫 만남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그녀의 나지막한 말투는 더없이 따뜻했고, 스스럼없는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우리의 대화는 늦은 시간까지 계속되었다.
며칠 후, 그녀의 취향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연희동 집에서, 우리는 부쩍 더해진 친밀감으로 서로를 마주했다. 예쁜 찻잔에 커피를 내려주며, 그녀는 조심스레 물었다. “저는 사실 무언가를 계획적으로 추진하는 성격이 아니어서요……. 아무런 목적 없이 그저 스스로에게 써 내려간 짧은 글들일 뿐인데, 독자들의 마음에 닿을 수 있을까요?”라고. 우리는 “어쩌면 그런 이유로, 많은 이들이 궁금해하는 ‘료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더 진솔하게 다가갈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라고 답했다.
스스로에 대해 “누군가를, 무언가를 저 끝까지 알고 싶은 사람”이라 말하는 그녀는, 그렇게 다정한 감각으로 모든 것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매일의 성실한 반복 속에서, 용기 있게 ‘나다움’이라는 단단한 언어를 발견해왔다. 그녀의 첫 산문집 『료의 생각 없는 생각』은 에세이인 동시에 일기이며, 화려한 성공담이 아니라, 조용한 마음의 기록이다. 정해진 대답 대신,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살아가는 그녀에게, 우리는 책을 마치는 아쉬움을 담아, 몇 가지 물음을 던지기로 했다. 독자들이 그녀와 더 깊은 대화를 이어갈 수 있기를 바라며…….
런던의 한 카페에서 “직업을 순식간에 바꾸고 싶을 만큼” 큰 울림을 받았다고 했는데요.
길을 걷다가 단순히 커피를 마시기 위해 들어간 곳이 ‘몬머스 커피’였어요. 상호도 모르고 들어갔는데, 공간은 작고 소박했지만, 다양한 인종과 연령의 사람들이 각자의 스타일로 일하는 모습이 완벽한 하나의 합처럼 느껴졌어요. 특히 그들의 모든 시선과 에너지가 ‘자기 자신’을 향해 있다는 것이,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움츠려 있던 그 시절의 저에게 너무나도 새로운 느낌으로, 마치 살면서 처음 보는 광경처럼 다가왔어요.
오랫동안 저는 늘 타인을 관찰하며 살아온 사람이었는데, 그날 처음으로 ‘나는 나 자신을 진심으로 바라본 적이 있었나?’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고, 그 순간 생각했어요. ‘어쩌면 내가 원했던 것은 돈이나 명예가 아니라, 아무런 조건 없이 몰입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런던에 머무는 동안, 하루에 한두 번씩 그곳을 찾으며, 내 감정이 판타지가 아닌지, 스스로 확인하고 싶었죠. 그런데 매일이 진짜였어요. 평생 하리라 믿었던 일을 그렇게 내려놓고, 직업을 일순간에 바꾸고 싶다는 마음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처럼 저를 뒤흔들었습니다. 몬머스는 저에게, 삶의 방향과 태도를 전환하게 해준 고마운 장소로 지금까지 남아 있어요..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은 료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로 느껴집니다. 료에게 있어서 ‘아름다움’이라는 미적 가치가 그렇게도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름다움에 주목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주의 깊게 바라볼 마음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삶,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관심과 연결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아름다움은 ‘만드는’ 게 아니라, 본래 존재하던 것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믿는데, 얼마나 진심으로, 주의 깊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발견의 깊이가 달라지는 것 같아요.
우리가 각자의 아름다움에 집중하는 시간을 들일 수 있다면, ‘추하다’거나 ‘무섭다’고 여겨지는 자극적인 것들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레 줄어들지 않을까요? 시대의 가치관도, 거대한 자본도 사람들이 무엇에 관심을 가지느냐에 따라 움직이니까요. 누군가는 미약하다 말할지라도, 결국 세상을 구하는 건 아름다움이라 믿고 싶어요.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할까요?
지금 우리는 너무 많은 정보와 자극 속에 살아가느라, 아름다움을 마주할 시간과 에너지를 점점 빼앗기고 있어서, 누군가는 먼저 말해야 한다고 생각해요—아름다움은 이미 태초부터 존재해왔고, 한 사람 한 사람 각자의 삶이 곧 ‘예술’이라는 사실을요. 처음엔 저도 ‘말해도 소용없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이제는 내가 원하는 세상이 있다면, 내가 먼저 첫 번째 배경이 되고 환경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작게라도 내 안의 무언가를 표현하는 일로써 누군가의 배경이 되어주는 것이 최소한의 소명이 아닐까 스스로에게 다짐합니다. 두렵지만 제 안의 것을 표현하고 시작하는 용기야말로 아름다움의 출발이라고 믿고 싶어요.
예술과 일상이 분리되지 않는 삶을 살고 계신 것 같습니다. 료가 생각하는 ‘예술’과 ‘생활’, 혹은 ‘예술’과 ‘일’ 사이의 경계는 어떤 것인가요?
네. 우리는 이미 예술 안에 살고 있고,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아티스트’로 태어났으니까요. 인간의 탄생, 나무의 성장, 벌레의 움직임, 돌과 대리석의 질감—이 모든 것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너무나 경이롭고 완벽한 질서 속에 존재하고 있어서, 결국 ‘존재 자체가 이미 예술’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거창하거나 특별한 것이 아니라, 나를 나답게 표현하는 모든 방식들, 글씨체, 말투, 먹는 방식, 작은 습관들까지 모든 것이 예술 활동이죠. 그렇게 보면 이 지구에 수십억 개의 예술이 존재하는 것이고, 우리 모두가 저마다의 아티스트로 살아가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저는 ‘일할 때의 나’, ‘집에서의 나’, ‘사랑할 때의 나’처럼 나를 분리하는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데, ‘워라밸’이라는 개념이 필요하게 된 건 삶이 이미 너무 분절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요. 특히 요즘 많은 사람들이 취미 대신 SNS에서 인증된 즐거움으로만 행복을 추구하는 것 같아서 안타까운데요. 하지만 예술은 그런 것들과 별개로, 하루하루 나를 발견하고 바라보는 과정 안에 있다고 생각해요. 내 몸의 모양을 관찰하거나, 피부의 감각을 느끼는 것, 발가락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는 것, 그런 일상이 곧 예술 활동인데, 중요한 건 ‘나는 어떻게 남들과 달라질 수 있는가’가 아니라, ‘이미 다르다’는 점을 아는 것입니다.
“나에게 가장 좋은 레퍼런스는 결국 나 자신”이라는 자각에 대해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물리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소셜 미디어에서 레퍼런스를 찾거나, 누군가가 이미 만들어놓은 ‘정답’을 따라가는데, 오히려 가장 강력한 레퍼런스는 이미 내 안에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직접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이 가장 ‘나’다운 자료이고,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출처인 것이죠. ‘자기 자신을 레퍼런스로 삼는다.’라는 자각은 이런 인식에서 출발했는데, ‘자아’라는 것은 처음부터 정해진 본질이 있는 게 아니라, 순간순간 내가 내리는 선택들의 합으로 구성된다고 생각해요. 그렇기에 자신이 직접 보고 느낀 것을 스스로 표현하고, 그것에서 ‘어떤 것을 선택해 지켜낼 것인가?’가 나를 결정하기 때문에, 타인의 정답을 따라가며 성공하려는 건 위험한 오해입니다. 결국 그것은 나에게 맞는 삶이 아닐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잃어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자신을 표현하고, 스스로에게 시간을 내어주며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실질적인 감각이 생기고, 그 과정이 진짜 나를 찾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름’에 대한 편견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만의 감각을 지속해나가며 ‘그저 갈 수 있는 힘’은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 궁금합니다.
어릴 때부터 저는 누군가가 만든 기준에 맞추는 것이 유난히도 어려운 아이였어요. 그래서 ‘다름’을 일찍부터 경험할 수밖에 없었어요. 제가 하는 질문들이 환대받지 못한다고 느꼈거든요. 학창 시절에도 일반적인 스타일을 싫어해서, 튀는 아이로 보인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자발적 고립을 선택하기도 했죠. 그러면서 유행이나 분위기에 휩쓸리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을 피할 수 있을까, 또는 나답게 비껴갈 수 있을까를 고민했던 것 같아요. 어른이 되면서 깨달았어요.
세상은 다수를 기준으로 움직이지만, 모두가 비슷한 방향으로 달리면, 결국 ‘같음’이라는 감옥에 갇혀버린다는 것을. 그래서 ‘다름’을 오히려 전략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아요. 달라서 불편했던 감정이 오히려 내가 나로 살 수 있는 힘이 되었고, 그것이 경제활동이나 창작에서도 중요한 자산이 된 것 같아요. 똑똑하지 않거나 가진 게 많지 않아도, ‘다르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다.’라는 생각과 경험이 저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저 사람은 유니크해.”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모두와 같아지려고 해요. 하지만 요즘은 ‘유니크함’이 경제력과도 직결되는 시대여서, 저는 이 시대를 ‘슬픈 호재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목적을 위해 ‘없는 나’를 억지로 채우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더 명확하게 드러내는 일에 집중하고 싶어요. 그것이 나만의 감각을 지속하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목표 대신 자유’라는 말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옵니다. 료에게 ‘성공’의 의미는 어떤 것일까요?
‘성공’이라는 목표보다는 자유롭게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 더 중요했으니까, 살아가면서 무언가를 악착같이 쥐기보다는, 그 상황 속에서 내가 풀 수 있는 작은 퀴즈들을 하나하나 풀어가며, 좌절 대신 배움을 택하는 삶을 지향해왔습니다. 걷다가 우연히 본 강아지 한 마리, 스치는 사람의 미소, 누군가의 예쁜 실루엣, 그런 일상의 마주침에서 ‘아, 내가 진짜 원하는 건 이런 것이구나.’ 하고 깨닫는 순간들이 있는데, 그 감각들을 따라 살아가다 보니, 어느새 내가 누구인지, 어떤 감정들을 품고 있는지 조금씩 더 알게 되었어요.
그렇게 나를 알아가며,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야 할 때, 그제서야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만약 죽음을 앞에 두고 있다면, 너무나도 아쉬울 것 같아요.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쉽지만 아쉽지 않다’는 생각으로 울면서, 웃으면서 눈을 감을 수 있다면, 어쩌면 그게 제가 생각하는 ‘마지막 성공’일 것 같아요.
저는 ‘성공’이라는 단어가 너무 무겁지 않을 때, 더 좋게 느껴져요.
예를 들면 “이거 성공했네~.” 하고 웃으며 말할 수 있는, 그런 작고 귀여운 성공들. 누군가에게 짧은 메일을 보내는 일도, 어떤 의미에서는 ‘삶의 성공’일 수 있어요. 삶 전체가 ‘내가 누구인지 알아가는 과정’이라면, 성공이란 결국 그 여정을 멈추지 않고 걸어가는 일, 그리고 그 안에서 작은 퀴즈들을 하나씩 풀어가는 일 같아요. 누군가는 어떤 자리나 업적을 성공이라고 말하겠지만, 저에게는 ‘내가 원하는 삶의 방향으로 하루를 잘 살아냈다’고 느낄 수 있는 날이, 가장 성공적인 날이라고 여겨져요.
『그리스인 조르바』의 “나를 구하는 유일한 길은 남을 구하려 애쓰는 것이다.”라는 말의 의미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가 됩니다. 료에게 ‘사랑’은 어떤 형태로 존재하나요?
그 문장을 처음 마주했을 때, 제가 늘 마음속으로 느끼고 있던 것을 마치 누군가 정확히 짚어준 것 같았어요. 누군가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은 어쩌면 ‘헤아림을 받고 싶은 마음’이어서, 결국 그 과정의 가장 큰 수혜자는 나 자신이었다는 걸 저는 종종 체감했거든요.
타인을 위하는 마음은 결국 나를 바라보게 하는 창이어서, 그 반대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저에게 사랑은 마치 ‘이어달리기’와도 같아서, 내가 누군가에게 준 마음은 꼭 돌려받지 않아도, 다른 방식으로 흘러가, 결국 또 다른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선물이 된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아쉽지만 사랑은 혼자만의 게임일 수도 있어요. 진짜 사랑은 ‘받기 위한 마음’이 아니라, ‘내가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를 아는 데서 완성되는……. 그래서 사랑은 결국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여정이고,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는 과정에서, 결국 나 자신을 마주하고 이해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남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사랑은 타인을 향하지만,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이 가장 많이 성장하는, 끝없는 ‘돌림노래’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